글라이스틴의 '올 것이 왔구나' (1)
글라이스틴 주한미국대사는 박대통령의 죽음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군사 쿠데타에 의해서 살해되었으리라는 판단을 했다'고 국무부에 보고했다(10월28일자 전문).
[나는 본국에서 귀임한 날로부터 박정희의 죽음에 이르는 며칠간 한 국 정부 내의 여러 요인들로부터 대통령이 잘못된 결정을 하고 있으며, 듣기 좋은 말만 하는 참모들에게만 귀를 기울이고 있다는 비판을 많이 듣게 되었다. 그래서 이 사건소식을 접하자 즉각적으로 군사쿠데타라고 생각했었는데 공모자의 흔적이 보이지 않아 이 판단을 바꾸게 되었다.
나는 대통령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김재규의 지도에 따라서 대통령을 제거하고 권력구조는 그대로 유지하면서 고분고분한 후계자를 선정하려 는 계획을 세웠을 가능성이 더 높다고 생각한다. 김재규는 박대통령의 강경책이 공화국을 위기에 빠뜨리고 있다고 판단한 여러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이 전문을 읽고 있으면 글라이스틴 대사가 이런 종류의 사태를 예상 하고 있었다는 느낌을 받는다. 27일 아침 글라이스틴이 요청하여 대사 관에서 맨 처음 만난 한국측 장성은 합참전략기획국장 손장래(그뒤 안 기부 해외담당차장, 현 일본 쓰쿠바 대학 연구교수)소장이었다. 손소장 은 자주 국방건설사업의 군내 실무책임자였다. 거의 매월 한두 번꼴로 대통령에게 사업진도를 보고하던 그는 글라이스틴대사도 만나고 있었다.
글라이스틴대사는 손장군을 통해서 자주국방에 대한 미국측의 우려를 대통령에게 전달하려는 목적이 있었다. 이날 손장군은 글라이스틴대사 가 '올 것이 왔다'는 자세로 담담하게 상황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인상 을 받았다. 대사는 혁명적 상황(Revolution), 또는 민주화를 위한 발전 적 상황(Evolution)으로 해석하고 있었다. 손장군은 박정희의 서거에는 미국의 정치적 작용이 영향을 주었으리라는 생각을 지금도 갖고 있는 사람이다. 1977년 청와대에서 열린 주한미군 철수에 대비한 여당-정부 합동연석회의에서 대비책을 보고했던 손장군에 따르면, 박대통령은 철 군반대시위를 조직하자는 말이 나오자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이번 기회를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아 자주국방을 건설하고 한미관계를 근본적으로 재정립해야 한다. 국가의 체통에 맞지 않는 일 을 해선 안된다'.
박정희가 말한 '한미관계의 재정립'은 미국과의 대등한, 자주적인 국가관계를 의미한다. 우리 민족사에서 김유신이 대당결전으로써 통일 신라의 자주와 독립을 지킨 이후 한 번도 시도해본 적이 없는 강대국에 대한 도전이었다. 이승만의 대미 자주노선은 외교력을 바탕으로 한 것 이지만 박정희의 자주노선은 국방력건설을 근거로 시도된 것이라는 근 본적인 차이점이 있다.
카터가 하려는 대로 주한미군이 빠지고 한국이 자주국방을 기반으로 한 자주노선을 추구한다는 것은 미국의 국익에 엄청난 타격을 주는 것 이었다. 미국은 주한미군 4만 명을 주둔시킴으로써 예비군을 포함하면 3백만이 넘는, 잘 훈련된 한국군에 대한 작전지휘권을 갖고 있었다. 이 막강한 군사력은 미국이 소련과 대결하는 세계전략에 있어서 유럽의 나 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군사력과 쌍벽을 이루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카터의 주한미군철수정책에 의하여 가속도가 붙게 된 박정희의 자주국 방정책은 미국의 세계전략에 있어서 중대한 수단 하나를 없애는 일이었 다. 미국 군부는 카터의주한미군철수정책을 취소시키기 위해서 한 3년 간 끈질긴 노력을 한다. 미국정보기관은 그동안의 북한 전력이 엄청과 소평가되었다는 보고서를냈다.
베시 미 8군사령관은 김재규부장에게 주 한미군철수에 따른 방위력보완협상을 할 때 이런저런 것을 요구하라고 가르쳐 주기도 했다. 한국측이 요구하는 보완예산이 너무 많아 차라리 주한미군을 그대로 두는 것이 경제적으로는 유리하다는 판단을 카터가 내리도록 하기 위해서 한국측을 이용한 것이다. 주한미군철수정책을 카 터가 포기한 것은 박정희의 반대 때문이라기보다는 미국 군부, 정보기 관,재향군인회,군수산업체, 공화당의 반대 때문이었다.
1979년 6월 말에 있었던 카터와 박정희의 만남은 '박정희의 정치적 약화또는 권력으로부터의 배제'를 미국정부의 의지로서 굳히는 계기가 되었다는 해석도 있다. 박정희의 당돌한 인물됨과 그의 자주국방의지가 견고한 것임을 확인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 직후 포항에 내려온 박정 희는 포철회장 박태준에게 말했다.
'내가 카터에게 자주국방정책을 양해해달라고 말했더니 화를 내고 나가버렸는데 아무래도 심상치 않아. 나도 각오해야겠어'.
미국은 박정희를 막다른 골목으로 몰기 위해 동원할 수 있는 수단을 국내에 많이 갖고 있었다. 야당, 학생 등 민주화세력에 대한 지원과 비 호,김재규 등 박정희 측근에 대한 설득작업, 주한미군을 이용한 한국군 수뇌부 설득, 미국언론을 활용한 인권문제 거론. '박정희가 저런 식으 로 자주국방정책을 추진하면 위험해질 것이다'고 하는 암시를 여러 번 받았다는 한국군의 한 핵심인사는 '특히 김재규는 글라이스틴대사, 브 루스터 CIA지부장, 위컴사령관의 집중적인 공략대상이었다'고 말했다.
'글라이스틴대사는 나에게 박정희의 후계자 문제를 거론하기도 했고, 지나가는 말처럼 '김재규는 우리 말을 잘 알아듣는다'고 말하기도 했습 니다. 그들은 김재규에게 구체적으로 대통령을 암살하라는 사주를 할 만큼 하수는 아닙니다. 김재규가 대통령을 제거하고 집권을 하면 적어 도 미국이 반대는 하지 않을 것이라는 심증 정도는 갖도록 만들었을 수 도 있습니다.'.
박대통령이 사망하자마자 최규하정부는 유신헌법 개정을 선언하고 정승화계엄사령관은 유신을 비판하게 된다. 이것은 박정희 주변부터가 이미 한국적 민주주의가 아닌 미국적 자유민주주의 논리에 설득되어 있 었다는 점을 암시하는 것이다.
1979년11월19일 글라이스틴대사는 대통령시해사건 군사재판을 앞두고 국무부에 흥미로운 해명성 전문을 보낸다. 이 전문에서 대사는 '김재규 는 앞으로 재판에서 나와 나의 전임자들이 자신에게 박 대통령을 공격 하라고 부추겼다는 주장을 하고 나올 가능성이 있다. 우리는 그런 일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가 박대통령의 행동을 공개적으로 비판한 것 때문에 한국 인들이 우리의 비판을 오해하여 박정희의 최후가 다가오고 있다든지, 그가 사라지는 것에 대하여 미국이 좋아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든지 하 는 식으로 생각했을 가능성은 있다'고 했다. 여기서 문제는 김재규에 대한 글라이스틴, 브루스터(CIA서울지부장)의 설득작전이 '박정희 거세' 라는 목적을 가지고 추진되었느냐 하는 점이다.
글라이스틴대사가 김재 규의 범행소식을 접하고는 즉각적으로 '군사 쿠데타'라고 생각했고,'김 재규가 대통령 주변 인물들을 이끌고 쿠데타를 일으킨 뒤 기존의 권력 구조는 유지한 채 후계자를 고른다는 계획을 추진했을 것이다'고 고백 하고있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김재규가 1979년11월8일 합수부에서 진술한 집권구상은 이러했다.
'육군총장을 설득 또는 협박하여 혁명위원회를 발족시키고 의장에는 본인이, 부의장에는 국무총리를 임명한 뒤 현 정부의 기존조직을 최대 로 활용하고 본인은 대통령에 출마하여….'.
김재규 구상과 글라이스틴의 선입견, 그 사이의 유사성은 단순히 우 연의 일치인가. 아니면 김재규가 쿠데타를 한다면 이런 식으로 할 것이 라는 정도의 파악이 되어 있었다는 이야기인가.
(계속).
[조갑제 출판국부국장·이동욱 월간조선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