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의 방황
5월23일 박대통령은 호남 지역 시찰중 기자들의 서면질문에 답변하 면서 이런 표현을 했다. <이러한 정국의 불안은 근본적으로 일부 정 치인들의 무궤도한 언동, 일부 언론의 무책임한 선동, 일부 학생들의 불법적 행동, 그리고 정부의 지나친 관용에 연유되었다고 본다.>
박대통령은 항상 '일부'란 말을 사용하여 반정부 세력이 건전한 국 민 대다수를 대표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려고 했다. 그는 정 치적 언어가 가진 심리적, 전략적 의미를 잘 알고 있었다. 대다수 신 문들은 언론을 건드린 대통령에게 거세게 반발했다. 조선일보 5월26일 자는 '정국불안은 과연 선동 때문인가-일부 언론의 책임을 따져본다' 란 지상토론 기획을 마련했다. 토론자로 등장한 홍종인(신문연구소 소 장) 장준하(사상계 사장) 한격만(한격만·한국 신문윤리위원회 위원장) 은 모두 언론을 옹호하고 대통령을 비판했으므로 찬반 토론이 되지 않 았다.
특히 장준하의 기고문은 요사이 신문에도 싣기 어려울 정도의 격렬 한 대통령 비판이었다. 일부를 인용한다.
<대통령 박정희씨! 당신이 그렇게도 거짓말과 실정을 거듭하였으면서도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것, 당신들 집권자들의 부정과 부패가 그렇게 창일하였으면서도 계속 집권할 수 있는 것, 민생이 이렇게까지 파탄에 빠졌는데도 아직 당신 들이 큰 소리칠 수 있는 것, 이 모든 것이 한국 언론이 당신들을 길러 준 덕이 아닌가요. 당신들과 정사를 할 것 같던 한국 언론은 소용돌이 치는 국민의 원성과 압력에 못이겨 이제 깊은 악몽에서 깨어난 것입니 다.
여보시오, 접대부의 치맛자락 같은 붓글을 휘둘러가며 당신을 도 와, 당신을 대통령으로 만든 것이 한국의 언론이 아니겠소. 고마운 줄 이나 아시오! 그 청렴하다고 소문이 높던, 그 강직하다고 정평이 있던, 그 육군소장 박정희씨라면 오늘의 이 사태를 정시하며 무엇을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해본 일이 있는가요. 슬픕니다. 오늘에 그때 당신 같 은 용기를 가진 그런 사나이가 없음이···.>
국회는 5월27일 야당이 제출한 국방장관과 내무장관에 대한 해임건 의안을 표결에 붙였다. 이번에는 공화당에서 이탈표가 없이 큰 표차로 부결되었다. 이 결과를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고하고 나온 공화당의 한 원내 간부는 기자들에게 '하마터면 총재를 잃을 뻔했다'고 말했다. 박 대통령은 이번 표결에도 공화당에서 반란표가 나오면 공화당 총재직을 내어놓을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 며칠 전 일요일 박대통령은 쉬고 있던 박상길 대통령 대변인 집에 전화를 걸었다. 박정희의 대표저작인 '국가와 혁명과 나'의 정리자 인 박상길은 5월초에 대변인으로 발탁되었었다. 박대변인의 어린 딸이 대통령이 직접 건 전화를 받아 혀짧은 말을 몇 마디 하더니 '아빠 대통령이래, 전화받아'라고 했다. 전화기를 나꿔 챈 박상길에게 대통령은 '뭘 하고 있소?'하고 물었다.
'그냥 쉬고 있습니다.' '별일 없으면 지금 좀 들어오시오.' 음산한 정세가 온 누리를 덮고 있는 일요일의 그 너른 대통령 관저 는 본관 전체를 통틀어 현관의 경호관 한두 사람 외에는 일직자도 눈 에 뜨이지 않는 썰렁한 분위기였다. 박상길이 긴 복도를 지나 대통령 집무실에 들어섰다. 박대통령은 넓은 바깥 정원을 멀거니 내다보고 있더니 이쪽으로 돌아서 무겁게 소파에 앉았다. 담배에 불을 당긴 그 는 몇 모금 빨고는 재떨이에 담뱃재를 털면서 탁상 아래를 응시한 채 침묵했다. 노크 소리가 나고 이후락비서실장이 들어와 박상길 맞은 편 에 앉았다. 박대통령은 자세를 고쳐잡더니 입을 뗐다.
'나 공화당 총재직을 그만두기로 하였소.대변인은 즉각 성명서를 써 오도록 하시오.' 이후락 비서실장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박상길 씀 '나와 제3·4공화국'에서 인용). '각하, 참 잘하셨습니다. 진작 그렇 게 하실 일입니다. 각하는 3천만 국민의 대통령이지 공화당만의 대통 령이 아니십니다.' 이후락과 생각이 달랐던 박상길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각하, 쓰기는 쓰겠습니다. 그런데 총재직 사임 성명이 아니라 대통 령 사임 성명을 쓰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각하는 공화당 공천으로, 공화당 총재로서 대통령이 되신 것 아닙니까. 그런 총재직을 사임한다 면 정당정치, 의회정치도 그만두시는 게 아닙니까. 싸우는 군단장이 전투는 계속하되 군단장은 사임하겠다, 이게 되겠습니까. 차라리 이렇 게 말씀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내가 이런 뜻으로 혁명을 했고 대 통령이 되어 이러이러하게 국가를 바로잡아 보려고 있는 애를 다 써 보았는데 이런저런 장애 때문에 이대로는 도저히 이 자리를 감당할 수 없어 물러가겠노라, 하시면 국민들이 그대로 받아주든지 아니면 그럴 수 없다고 하면 그럼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무슨 반응이 있지 않겠습 니까. 받아주면 깨끗이 물러나시고 그렇지 않으면 불란서의 드골처럼 비상대권을 요구해보시든지 무슨 수가 있지 않겠습니까.'
박대통령은 박상길의 눈을 뚫어지게 쏘아보며 묵묵히 듣고 있더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알았소. 당장 그 드골헌법을 정리해서 내게 가져오도록 하시오.' 의외로 일은 싱겁게 끝났다. 며칠 뒤 박상길은 드골헌법을 분석한 자료를 가지고 부름만 기다리고 있다가 집무시간이 파할 무렵 슬그머니 대통령 집무실에 들렀다. 박대통령은 아무 반응이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