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후락 실장 문제
1964년 6·3사태 이후 계엄령이 펴지고 군부의 압력으로 공화당 의장직에서 물러난 김종필 후임으로는 초대 공화당 총재를 지낸 정구영의원이 의장서리로 임명되었다. 6월10일의 일이었다. 그가 당의장이 되고나서 보니 당 운영경비를 대통령비서실장 이후락한테서 타 쓰고 있었다. 변호사 출신인 그는 이틀 뒤 청 와대에 들어가 박정희 대통령과 만났다. 그는 먼저 정치자금 이야기부터 꺼냈다.
'나는 30여년 간 법조계 생활을 했기 때문에 모든 것을 법치라는 면에서 생 각하고 있습니다. 민주국가에서는 법치주의가 절대적 요청입니다. 정치자금을 염출한다는 것은 우리 형편에서 대단히 어렵습니다. 김종필씨가 궁지에 몰린 소위 4대 의혹 사건도 정치자금을 모으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 하는 걸 보여줍니다. 먼저 진언드리고싶은 것은 청와대에선 정치자금에 대해선 상관하 지 말라는 것입니다.'.
박대통령은 '뭐 그런 일이 있었나요'라고 했다. 정구영은 이후락 실장에 대 해서 문제를 제기했다.
'항간에서는 내각은 껍데기이고 알짜는 청와대에 있다, 이후락 실장은 부통 령이나 마찬가지이고 실제로는 국무총리 대행이고 재무장관이고 상공장관이다, 인사·자금에 관한 것은 이후락씨를 통하지 않고서는 일이 안된다, 정부 장관 들은 로보트다, 이실장의 쪽지 한 장만 들어가면 그것이 곧 지상명령이다, 이 런 말이 벌써 유포되고 있습니다. 이후락군으로 하여금 그런 일을 못하게 하면 좋겠습니다. 비서실장을 바꾸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생각해보겠습니다. 좋은 의견이신데 잘 생각해서 처리하겠습니다.'.
정구영은 물러나 이후락 실장이 교체되기를 기다렸으나 소식이 없어 또 청 와대로 들어가 박대통령을 만났다.
'청와대 비서실에서 정치자금을 맡게 되면 그것은 대통령이 직접 하는 것과 마찬가지가 됩니다. 비서실장은 대통령의 분부를 기계적으로 이를 전달하는 사 람이어야 합니다. 고려 조선 역사를 보더라도 환관 정치는 백해무익입니다. 제 3공화국 출발 초에 대통령이 환관정치를 해서 되겠습니까.' '비서실장에 대해 말들이 많고 부작용이 있다면 시정해야겠지요. 선생님 말 씀대로 교체하겠습니다. 그렇지만 시간을 좀 주십시오.'.
정구영 의장서리는 몇 주를 기다렸으나 역시 이후락은 건재했다. 정구영은 청와대로 들어간 김에 또 그 이야기를 꺼냈다고 한다('정구영 회고록-실패한 도전'). 박대통령은 '이후락군이 그만두면 후임은 누가 좋겠습니까'하고 물었 다.
'그거야 대통령께서 고르실 일이 아닙니까. 그렇지만 마땅한 사람이 없어 저더러 추천하라면 하겠습니다.' '누굽니까.'.
'서인석(뉴욕타임즈 기자 출신의 공화당 전국구 의원)군은 어떻습니까. 제 가 근 2년간 접촉해보니 젊은 사람이지만 상당한 식견이 있고 이런 면에서 유 능하다고 봤습니다.' '그 사람은 국회의원인데 의원직을 사임하고 비서실장을 할까요.'.
'대통령께서 나라를 위하시는 입장에서 권하시면 그도 의원직을 내놓고 소 임을 맡을 것입니다. 저도 그 일에 협조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며칠 여유를 주십시요.'.
홀가분한 기분이 된 정구영은 청와대를 물러나 소식을 기다렸으나 이후락은 오히려 당정회의에도 참석하는 등 활동이 더욱 활발해지는 것이었다. 정구영은 그 뒤로는 이후락 문제를 꺼내지 않는 대신 대통령과 이야기하는 도중에 이 실 장이 들어오면 입을 닫아버렸다.
'각하하고 저하고 정책문제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는데 왜 자주 이후락군을 입회시킵니까. 그는 사무관입니다.'.
그 이후로는 박정희 대통령도 이후락 실장으로 하여금 배석하지 못하게 했 다. 그랬는데도 이실장은 조용히 들어와 저만치에서 가만히 서 있는 경우가 있 었다. 그러면 대통령은 '실장은 좀 나가 있어'라고 했다. 공화당 당무회의에서 도 김용태 의원 등이 '당의 이름으로 이후락의 해임을 대통령께 건의합시다'라 고 들고 일어났다. 정구영은 '그 문제는 당의장인 내게 맡겨달라'고 타일렀다.
다음날 당정연석회의가 대통령 주재로 청와대에서 열렸다. 정구영 의장이 이후락 문제를 꺼내지 않으니 김용태 의원이 '어째서 당무회의에서 결의한 것 을 말씀드리지 않습니까'라고 대들었다. 대통령이 의아해하면서 '무엇을 가지 고 그러는 겁니까'하고 물었다.
정구영이 자초지종을 이야기하니 대통령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아래를 내려 다보고 한동안 침묵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정색을 하고 말했다고 한다.
'대통령 비서실에 관한 인사문제는 대통령에게 일임하시지요.'.
정구영은 당무회의의 산회를 선포하고 대통령을 따라나와 집무실로 들어가 사과했다. 박대통령은 '이거 너무들 하십니다'라고만 했다. 다음날 정구영은 당의장서리 사퇴서를 대통령에게 냈다.
(조갑제출판국부국장기자) (이동욱월간조선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