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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원
 김태원
 
 악몽에 시달린 신재순은 아침에 일어나 박정희 등판에서 쏟아진 피묻은 원피스를 빨았다. 선혈은 시커멓게 변해 있었고, 잘 지워지지 않았다. 내다버릴까 하다가 박종화의 소설 '금삼의 피'가 생각났다. 옷을 베란다에 널고 소파에 앉아 박선호의 마지막 말을 떠올렸다.
 
 '오늘 일은 우리가 찾을 때까지 아무한테도 발설하지 마시오.'.
 
 라디오를 켰다. 신재순은 뉴스를 듣고는 더 큰 고민에 빠졌다. 정부 발표라는 게 '김재규 부장이 차지철 실장과 싸우다가 잘못 쏜 총탄에 각하가 서거했다'는 게 아닌가. 김재규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판단한 신재순은 그렇지 않아도 활달한 성격에 혼자서만 진실을 간직하고 있자니 답답하기만했다. 성당에 가서 고해성사나 할까 망설이면서 그날을 보내고 나니 다음날부터 제대로 발표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 사이 합수본 부수사관들은 신재순을 찾아서 서울을 뒤지고 있었다.
 
 박정희는 그의 죽음을 정확히 기억할 수 있는 최후의 목격자를 가졌다는 점에서는 행운이었다. 이 신재순씨가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최근 귀국하였다. 지금은 마흔두 살의 중년여성인 신씨를 만나 박정희의 마지 막 모습을 다시 한번 들어보았다.
 
 '그날 밤 대통령께서는 좀 취하셨던 것 같아요. 하지만 몸을 가누지 못한다든지 말이 헛 나온다든지 하는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인자한 아버지같았어요. 처음에는 긴장했는데 식탁에 놓인 반찬을 보니 마음이 놓였어요. 대통령이면 굉장할 줄 알았는데 너무 평범해서…. 특별한 반찬이 라면 꿀에 재운 인삼 한 가지였습니다. 대통령은 조용하면서도 씩씩하고 절도가 있는 분이란 느낌이었습니다.
 
 피를 쏟으시면서도 '난 괜찮아'란 말을 또박또박 했으니까요. 그분의 마지막 모습은 체념한 모습이었는데 허무적이라기보다는 해탈한 모습 같았다 할까요. 총을 맞기 전에는 '뭣 들하는 거야!'하고 화를 내셨지만 총을 맞고서는 그 현실을 받아들이겠다는 자세였어요. 어차피 일은 벌어졌으니까요.'.
 
 1979년10월26일 오후 7시50분쯤 정보부장 의전과장이자 궁정동 시설 관리책임자인 박선호는 김재규가 정승화 육군참모총장과 함께 차를 타고 떠나는 것을 확인한 다음 길을 건너 경비원 대기실이 있는 가동으로 갔 다. 김재규가 버린 것을 주워 바지 호주머니에 넣어두었던 32구경 권총을 대기실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경비원들이 숨을 죽이고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박선호는 그때까지 신고 있던 슬리퍼를 구두로 갈아신으면서 경비원들에게 '무장들 다 했나?'라고 했다.
 
 10여명의 경비원들은 일제히 '예! 다 했습니다'라고 복창했다.
 
 '음, 됐어'.
 
 박선호는 2층에 있는 자신의 사무실로 올라갔다. 한 3분 있다가 내려 온 박 과장은 경비원들에게 말했다.
 
 '청와대에서 경호원들이 몰려오면 쏴버려.'.
 
 말은 강하게 했지만 박선호는 '떨리는 가슴에 경호원이 필요하여 동작이 빠르고 믿음직한 김태원이를 불러 무장하고 따라오게 했다'(합수부 1차 자필진술서)는 것이다. 경비원 김태원(당시 32세)은 그때 이 가동의 출입문에서 경비를 서고 있었다. 박 과장이 바깥으로 나설 때 문을 열어 주었더니 몇 걸음 나섰다가 되돌아서면서 '자네 따라와'라고 하더란 것 이다. 이 한 마디로 아내, 네살배기 아들, 한 살짜리 딸을 두고 있었던 그의 운명이 결정되어버린다.
 
 나동 정문까지 갈 동안 박과장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문에 도착하니 이기주가 김태원에게 '정문경비를 좀 서고 있으라'고 하더니 박 과장을 따라가는 것이었다. 이기주는 과장에게 김계원 실장이 부상당한 대통령을 차에 싣고 병원으로 갔다고 보고했다. 쿠데타를 하는 데 있어서 절대적인 보안대상인 대통령이 현장을 떠났는데도 박선호는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김재규로부터 일언반구 지시나 지침을 받아놓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안은 어때?'.
 
 박과장은 경호실장과 네 명의 경호원이 피격되어 쓰러져 있는 건물 안을 가리키면서 물었다.
 
 '부상당한 것 같습니다.' '안에 들어가 꿈틀거리는 놈이 있으면 깨끗이 정리해.'.
 
 위의 대화는 박선호의 진술에 기초한 것인데 이기주는 과장이 김태원에게 '정리'를 지시했다는 것이다.
 
 '박 과장은 혼잣말로 중얼거리더니 '김태원이한테 안에 들어가 전부 깨끗하게 쏴죽여버리라고 해'라고 하기에 그 즉시 부근에 있던 김태원이 에게 과장의 지시를 그대로 전달했습니다'(군검찰1차진술서).
 
 이기주가 정문으로 달려와서 과장의 지시를 전달하는 것을 들은 김태원은 겁에 질린 말투로 이렇게 이야기했다.
 
 '저 안에 무서워서 어떻게 들어갑니까?' '무섭기는 무엇이 무서워요.' '할아버지와 부장님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피신하셨어요.' '그래도 무서워서 혼자서는 못들어가겠어요.' '나도 한번도 들어가본 적이 없는데 같이 갑시다.'.
 
 이후의 전개에 대해서 김태원은 이틀 뒤(28일)에 합수부에서 작성한 자필진술서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이기주가 앞서서 경호원대기실로 들어가기에 따라 들어갔습니다. 문 입구에서 텔레비전 앞에 엎어져 있는 사람(기자 주 안재송)에게 한 발을 쏘았습니다. 그리고 탁자 앞에 엎어져 있는 사람(정인형)에게 한 발 을 쏜 후 명중되지 않은 것 같아 다시 한 발을 쏘았습니다.
 
 이기주가 마루쪽을 가리키면서 '저쪽에도 있다'고 해서 인공연못쪽으로 가다가 안방미닫이 문앞쪽에서 '음…'하는 신음소리가 들려 마루 중앙에서 돌아서서 하늘을 보고 누워 있는 뚱뚱한 사람(차지철)의 복부를 향하여 한 발을 쏘았습니다. 한 발을 쏘고 나니 왼쪽 팔이 움직이는 것 같아서 다시 한 발을 쏘았습니다. 주방으로 들어가면서 먼저 조리대 앞에 엎어져 있는 사람(김용섭 경호원)의 등판을 향해서 한 발을 쏘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옆을 보니 식당차 운전사 김용남, 조리사 김일선, 이정오가 엎드려 있었습니다.]
 
 김용남은 조금 전 박흥주 이기주 유성옥이 주방 안을 향해서 일제 사격을 할 때 오른쪽 어깨에 관통상을 입고 그 자리에 엎드렸다. 옆에 쓰러져 있던 김용섭 경호원은 '살려줘, 살려줘'하면서 신음하고 있었다. 김용남은 쓰러진 상태에서 총성이 가깝게 들려오는 것을 감지하고 있었다. 바로 옆에서 '꽝'하는 총성이 나더니 귀가 멍멍해졌다. 김용남은 '이제는 내 차례이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계속).
 
 [조갑제 출판국부국장·이동욱 월간조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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