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군, 월남에 가다
외무부는 1964년 6월30일 신상철 주 월남대사에게 '월남정부가 정식으로 우리 정부에 파병요청을 하도록 통고하라'고 지시했다. 7월15일엔 월남 군사혁명위원회 위원장 겸 수상인 구엔 칸장군으 로부터 공식적인 원조 요청이 우리 정부에 전달되었다. 한미 양국 은 우선 130명으로 구성된 이동외과병원과 장교 10명으로 조직된 태권도 지도요원들을 파견키고 합의했다.
미국측은 파월 한국군의 장비, 시설, 보급, 정비 및 급식에 대 한 군수지원을 책임지고 한국군은 이들의 봉급, 수당, 출장비를 부담하기로 했다. 파병에 따른 예산지출의 대부분이 미국측 부담 으로 된것이다. 우리 정부는 파월되는 우리 군요원들의 외교상 지 위문제로 월남정부와 협상을 벌이기 시작했다. 1950년 12월23일 미국이 캠보디아, 프랑스, 라오스, 월남정부와 서명한 5자협정 (Pentelateral Agreement)은 재월 미군에 대해 외교관과 같은 치 외법권을 인정하고 있었다.
미군에 대해 무관세, 무과세, 독자적인 재판 관할권 등을 명시 한 이 특혜를 우리도 받아야 한다는 것이 박정희 정부의 방침이었 다. 월남을 지원하기 위하여 파견된 호주 군사훈련단은 사전에 미 군과 협의하여 미군과 같은 치외법권의 특혜를 받기로 월남정부와 합의한 상태였다. 월남정부는 호주에 대한 것과 같은 특권을 한국 군인들에게 부여하는 것을 꺼려했다. 그 대신 콜롬보 계획에 의하 여 월남에 파견된 외국인들에게 주는 정도의 특권만 주겠다고 했 다. 우리 정부와 신상철 대사는 월남정부를 압박하여 결국은 미군 과 호주군이 누리는 정도의 외교관 대우를 얻어냈다.
박정희 정부는 7월22일 계엄령 하의 국회에 '월남공화국 지원 을 위한 국군부대의 해외파견에 관한 동의요청안'을 제출했고 7월 31일 본회의에서 통과되었다. 야당의 조직적인 반대는 없었다. 이 동외과 병원 요원들의 파견이 결국은 약5만 명의 대군파견으로 이 어질 것이라고 예상하는 야당의원들은 별로 없었다.
1964년 8월3일 월맹의 통킹만 공해상에 있던 미국 해군 구축함 매독스호를 향해서 월맹해군의 초계함이 어뢰를 발사했다. 다음날 밤중에 매독스호와 자매함인 터너 조이호는 레이더 화면에 어뢰 수십발이 다가오는 항적을 발견하고 네 시간 동안 암흑속에서 함 포사격을 퍼부었다. 두배의 함장은 수척의 월맹 초계함을 격침시 켰다고 보고했다. 다음날 새벽 매독스호의 함장은 레이더에 포착 된 것은 어뢰가 아니라 기상현상으로 밝혀졌다고 보고하면서 월맹 의 초계함이 격침되었는지는 아직 육안으로 확인하지 못했다고 했 다.
이 순간 린든 존슨 대통령은 대통령 선거 운동중이었다. 그는 통킹만의 충돌보고를 받고는 표를 의식했음인지 단호한(또는 무모 한) 보복조치를 명령했다. 전투기들이 64회 출격하여 월맹의 해군 기지, 석유저장소를 폭격했다. 그 이틀 뒤 존슨 대통령은 의회로 부터 '통킹만 결의안'이라고 불리는 권한을 승인받았다. '미군에 대한 공격을 차단하기 위하여 필요한 모든 조치를 취할 수 있는 권한'을 대통령에게 부여한 이 결의안은 존슨 대통령에게 사실상 선전포고권을 준 셈이었다.
존슨 대통령은 이 결의안을 믿고 월남전선에 미군 투입을 결정 했고 그 후에도 병력 증강을 쉽사리 할수 있었다. 존슨 대통령의 결정을 수월하게 만든 이 결의안은 1970년에야 미국 상원들에 의 해 폐기되지만 때는 너무나 늦어버렸다.
1964년 9월11일. 140명의 파월장병들은 부산항을 떠났다. 이들 은 9월22일 월남에 도착, 28일에는 사이공 동쪽에 있는 해안 휴양 도시 붕타우의 월남 육군정양병원에서 시무식을 거행했다.
1964년 9월30일 밤 청와대에서는 박정희 대통령의 47회 생일 축하 모임이 있었다. 박대통령은 이효상 국회의장, 조진만 대법원 장, 정일권 국무총리, 정구영 공화당의장, 최두선-김현철 전 총리, 이주일감사원장, 이석제 총무처장관, 김형욱 정보부장을 초청하여 저녁식사를 했다.
반주를 겻들인 모임은 술잔이 빠르게 돌아가면서 노래자랑으로 변했다. 이 자리의 분위기를 이끈 것은'주력의 관록자' 최두선 전 총리였다. 박대통령은 '황성옛터'를 불렀고 정구영은 '푸른 하늘 은하수'를, 이효상-최두선은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를 합창했다. 밤11시30분까지 간 이날 모임은 그러나 박대통령의 진짜 생일보다 40여일 먼저 치른 것이었다.
박대통령은 1917년 11월14일 오전 11시경에 태어났는데 그날은 음력으로 9월30일이었다. 박대통령의 생일은 그냥 9월30일로 알려 졌고 외부에서도 이날에 축하를 해주곤 했다. 박대통령은 '다른 사람들이 모두 내 생일을 9월30일로 생각하니 거기에 따르면 되는 것 아닌가'라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고 한다. 생일기념이 11월 14일로 바뀐 것은 몇 년 뒤의 일이다.
1964년 10월3일, 미 국무부의 극동담당차관보 윌리엄 P 번디가 서울에 와서 박대통령,이동원 외무장관과 회담했다. 그는 지난 봄 에 학생 시위로 중단된 한일회담의 재개를 촉구하기 위하여 한일 양국을 순방하고 있었다. 번디 차관보와 이동원 장관은 공동성명 에서 한일회담의 조속한 재개를 희망했다. 두 사람은 또 '한일 정 상화 후에도 미국의 경제 및 군사원조는 계속될 것'라는 미국의 약속을 재확인했다고 발표했다.
(조갑제출판국부국장기자) (이동욱월간조선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