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내 수업
1964년 12월6일, 박대통령 일행을 태운 서독 루프트한자기는 예정보다 10분 늦은 오후 4시25분(한국시간 오후5시25분) 홍콩의 카이탁 공항에 도착했다. 진필식 홍콩 영사 부부가 마중나와 대통령 부부를 탑승기 밖으로 안내했다. 백여 명의 교포들이 태극기를 들고 환영했다. 박대통령 부부는 홍콩 총독 데이빗 트렌치 경의 환영인사를 받고 공항 귀빈실로 직행했다. 얼마 전까지 주한독일대사로 박대통령의 방독준비를 도왔던 칼 뷩거 대사가 홍콩주재 총영사로 전임해와 박대통령을 마중 나왔다.
오후5시5분(한국시간 오후6시5분) 홍콩을 떠날 때 박대통령은 기분이 비로소 좋아지기 시작했다. 박정희는 홍콩을 이륙하자 김성진 공화당의원을 옆자리로 불러 환담했다. 루프트한자기는 베트남과 캄보디아 상공을 통과했다. 창밖으로 어둠이 깔리고 있었다.
방콕 도무앙 공항에 도착한 때는 예정보다 17분 늦은 오후 6시52분(한국시간 오후8시52분). 장성환 대사와 태국 의전장이 기상까지 올라와 대통령을 영접했다. 트랩을 내려선 박대통령을 살비타른 태국 국왕 대리와 타놈 태국 수상 등 10여명의 고관· 장성 및 50여명의 교포들이 환영해주었다.
박정희는 전날이 태국 국왕의 생일이었음을 축하하자 타놈 수상은 생일 케이크를 대통령에게 전달했다. 박정희는 환영나온 교포 자녀들을 일일이 어루만져 준 뒤 귀빈실로 향했다.
길고 밋밋한 '초크' 의자에 타놈 수상과 나란히 앉은 박정희 대통령은 타놈 수상이 권하는 음료수를 마시고 담배를 꺼내 타놈 수상에게 권했다. 박대통령은 시종 이마에서 흐르는 땀을 닦으며 담배를 피웠다. 무척 즐거운 표정으로 타놈 수상과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오후 7시 38분, 방콕을 떠난 특별기는 뉴델리로 향했다. 박정희는 가는 곳마다 자신에 대해 국가원수로서의 예우를 해 주는 데 무척 기분이 좋았다. 방콕을 이륙한 직후 박정희는 샴페인 잔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 기내를 돌아다니며 일행들과 잡담을 나누다가 맨 뒤에서 셋째 줄에 앉아 있던 대통령 통역관 백영훈 교수의 옆자리에 앉았다.
백교수가 '정치하시니 힘드시죠'라고 하자 박정희는 '정치라는 건…'하며 말문을 열더니 의자에 접혀진 테이블을 펼쳤다. 박정희는 성냥을 꺼내더니 그 중 하나를 집어들며 '정치라는 것은, 파워 (Power)하고…' 성냥개비를 테이블 위에 놓았다. 이어서 또다른 성냥개피 하나를 들더니 '마니(Money)!'라고 하면서 먼저 놓았던 성냥개비 옆에 나란히 놓았다.
'정치란 이 두 개가 평행하게 가도록 하는 기술입니다. 국가라는 기차가 달리는 레루(레일의 일본식 발음)지요. 레루의 한쪽은 권력이고 다른 한쪽은 재벌입니다. 한 나라의 경제가 발전하고 안보가 튼튼해지려면 재벌과 권력이 평행선을 그려야 합니다. 힘이 너무 커서도 안되고, 재벌이 너무 커서도 안됩니다. 균형을 잃으면 스파크가 납니다. 정치는 돈과 힘(권력)의 균형을 만드는 작업이지요.'
이어서 박정희는 자신이 혁명 초기에 재벌총수들을 잡아들였다가 풀어준 이야기를 했다. 박정희는 백영훈 교수에게 재벌에 대한 욕을 한참 늘어 놓더니 '그렇지만 나라가 크려면 이 사람들을 잘 이용해야 합니다'라며 이야기를 맺었다.
이어서 박정희는 백교수에게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독일 경제 이야기를 좀 해주시오. 거, 독일 경제가 성공한 것을 두고 라인강의 기적이라는 데 그 원동력이 뭡니까.' '지금 수상이신 에르하르트의 경제전략이 맞아 떨어진 겁니다.'
서독 부흥기에 서독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은 백영훈 교수는 상세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박정희는 바지 뒷주머니에서 조그만 수첩을 꺼내더니 메모를 해 갔다. 질문은 서너 차례 계속됐다.
'사회적 시장경제가 뭡니까.' '서독의 기간산업은 어떻게 되어 있습니까.'
기내에서 백영훈교수로부터 경제학 공부를 하던 박정희대통령은 백교수에게 '앞으로 제 경제고문이 좀 되어 주십시오'라고 했다. 박정희는 서독 방문 후 경부고속도로 추진과정에서 백영훈 교수를 대통령 경제고문으로 활용한다.
당시 외무장관이었던 이동원(현 국민회의 국회의원)은 기자에게 이런 회고담을 들려주었다.
'서독 방문이 결정된 다음이었습니다. 유럽에서는 뭐니 뭐니 해도 영국과 프랑스가 중심국입니다. 그래서 '각하, 기왕 유럽에 가시는 길인데 이번 기회에 영국과 프랑스도 한번 들러 구경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제가 한 번 주선해 볼까요'라고 권했지요. 그런데 이 양반은 '지금 우리나라가 급한데 관광할 시간이 어딨소. 일하기 위해 배우러 가는데…'라며 거절하시는 겁니다.'
백교수와 이야기를 끝낸 박정희는 자리를 옮기지 않은 채 이후락 비서실장과 박상길 공보비서관을 불러 본 공항에 도착해서 가질 기자회견문에 대해 의논했다. 문구를 조정할 때엔 독일어에 능통한 백영훈 교수에게 '너무 강한 어감이 아닐까?'하며 묻기도 했다.
(조갑제출판국부국장기자) (이동욱월간조선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