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역관 백영훈 이야기
박정희는 혁명 직후 미국보다 서독으로부터 신세를 많이 졌다. 1961년 5·16 혁명 직후 미국은 군사정부를 견제하기 위해 경제 원조를 압력수단으로 사용하고 있었고, 외화 부족에 직면했던 군사정부로서는 미국의 경제압력이 고통스러웠다. 군사정부는 1961년11월말 정래혁 상공부장관을 주축으로 한 '차관 교섭 사절단'을 구성해 전후 경제부흥에 성공했던 서독으로 보냈다.
신응균 서독 대사의 안내로 정래혁장관은 서독의 에르하르트 경제상(뒤에 서독 수상)등과 만나 교섭을 벌였다. 에르하르트 경제상은 분단과 전쟁으로 피폐해진 한국에 대해 깊은 공감을 갖게 되고 약 3천7백만 달러에 해당하는 마르크화 차관을 한국정부에 제공해주었다. 한국이 5·16이후 유치한 최초의 차관이었다.
이 차관을 얻게 된 배경에서 한 흥미있는 인물이 등장한다. 그는 정래혁 상공부 장관의 특별 보좌관이던 백영훈(69·대통령 경제 고문, 생산성본부연구소장, 9·10대 국회의원 역임, 현 한국산업개발연구원 원장) 이등병. 그의 전직은 중앙대학교 경제학 교수였다.
백영훈은 고려대학교 상과대학에 재학중 6·25를 만났다. 한강 다리가 끊겨 서울시내를 배회하다 인민군에 끌려가 의용군이 된 백영훈은 낙동강 전선에 투입되었다가 미 공군의 B-29 폭격 와중에 탈출했다.
1950년 9·28 서울 수복으로 학교에 재입학했으나 영장이 나와 1930년생에게 처음 적용되었던 징병 제1기로 입대했다. 신병 교육을 마치고 백마고지에 투입돼 두 달간 전투를 벌이던 중 영어를 할 수 있다는 이유로 일부 사단장과 연대장이 비공식적으로 운용하던 노무단 관리장교가 되었다. 육군 중위라는 계급도 중대장이 현장에서 자의적으로 붙여 준 것이었다. 1년 여 통역 임무를 수행하다 휴전 후 전역한 그는 어느날 병무청에서 자신의 군근무기록이 아예 없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병무기록이 없어 군 미필자가 된 그는 1954년 서독 유학시험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응시, 합격했다. 그는 1958년 서독 에르랑겐 대학원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아 대한민국 경제학 박사 제1호가 되었지만 귀국여비가 없어 손원일 당시 주독 대사에게 부탁했다고 한다. 손대사는 이승만대통령에게 이 사실을 보고함으로써 이대통령이 여비를 부쳐주어 귀국할 수 있었다. 그는 중앙대학교에서 경제학 교수로 1년 5개월 동안 강의하다가 1961년 5·16 을 만났다.
백영훈 교수는 혁명정부의 병역기피자 소탕작전에 걸려 1961년 7월1일자로 논산 훈련소에 입대했고, 신병훈련을 받던 중 '지프차가 와서 데려갔다'고 한다.
당시 상공부 장관이었던 정래혁의 회고에 따르면 '혁명정부는 경제에 밝은 보좌관을 물색중이었는데 함인영박사 등 많은 사람들이 백영훈씨를 추천하여 찾아 보니까 논산 훈련소에 있었다'는 것이다.
백영훈 훈련병은 영문도 모른 채 중앙정보부 김종필부장 앞으로 끌려가게 되었다고 한다.
'서울역 부근 건물로 가서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을 만났습니다. '잘 도와주십시오'라고 하더군요. 잠시 후, 자신을 '국장'이라고 소개하는 중령 계급장을 단 몇 몇 사람들에게 넘겨졌습니다. 그들로부터 한 일주일간 혁명정부의 이념에 대해 세뇌교육을 받고 난 뒤 정래혁 상공부장관의 특별보좌관으로 군복무를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백영훈 이등병은 1961년 11월 정래혁 장관이 이끄는 차관 교섭단에 포함되어 서독을 방문했다. 정장관이 서독 각료들과 만나는 동안 백영훈 보좌관은 자신의 은사들을 만나 한국에 차관을 지원하도록 협조해 달라고 부탁했다.
백영훈은 1963년 말 대통령 선거 직후 민정이양이 시작될 무렵 중앙대학교로 복직했다. 1964년 11월 초, 백교수는 청와대 의전비서실에서 나왔다는 지프차에 실려 청와대로 가게 되었다.
'대통령 집무실인 것 같았습니다. 박대통령과 이동원외무장관, 장기영부총리, 이후락비서실장이 앉아 환담중이더군요. 서독 방문 이야기였습니다. 제가 들어서자 박대통령이 일어나 나에게로 오시더니 제 손을 꼭 잡으면서 '통역관 좀 해 주시오'라고 부탁하는 것이었습니다.'
대통령 통역관이 된 백영훈이 맨 처음 한 일은 대통령 전용기 마련이었다. 국내에서는 독일까지 장거리 비행을 해 낼 기종이 없었다. 이동원 외무장관과 머리를 맞대고 논의한 백영훈은 주한 서독 대사를 통해 서독 정부로부터 비행기 한 대를 빌리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1964년 12월6일 밤 9시35분(한국시각 12월7일 새벽 1시15분), 대통령의 탑승기는 인도의 뉴델리 공항에 기착했다. 깊은 밤인데도 날씨는 후덥지근했다. 한기봉총영사 부부와 카울 인도 외무성 차관보의 영접을 받은 뒤 한 시간 후에 다음 기착지인 파키스탄의 카라치 공항으로 향했다. 기착지마다 출영나온 인사들을 만나야 하는 박정희는 잠을 길게 잘 수가 없었다. 뉴델리에서 카라치로 향하는 1시간 동안, 즉 데칸 고원 위로 비행하는 도중에 박정희는 잠깐 눈을 붙였다. 카라치에서의 한 시간은 지루하게 보냈다. 서로 국교가 없는 탓에 국빈을 위한 출영도 없었다. 시골 대합실 같은 곳에서 박정희는 무료하게 한 시간 동안 출발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이집트 카이로에 도착한 시간은 새벽 0시 35분(한국시각 오전4시35분). 사람들이 깊은 잠에 빠져 있을 시간에 이집트 탈라트 카이리 청년 장관과 모하메드 아델 모이라드 관방장관, 루프트한자 항공사 발터 지사장 및 강춘희 총영사가 영접을 나왔다.
친북외교노선을 추구하고 있던 낫세르 이집트 대통령은 청년장관을 통해 '박대통령의 장도를 축하하며 성공을 빈다'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약 50분간 체류하는 동안 박정희는 카이리 청년장관에게 1967년에 완공되는 이집트 애스원 댐에 대해 이것 저것 물었다. 한국의 전력생산 용량이 1백만 킬로와트도 안되었을 때 이집트의 애스원 댐은 1천2백만 킬로와트의 용량을 자랑하고 있었다.
(조갑제출판국부국장기자) (이동욱월간조선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