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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고
 충고
 
 에르하르트 수상과의 단독회담을 시작하면서 먼저 말문을 연 박정희대통령은 수상에게 기회를 주지 않은 채 같은 내용을 다른 표현으로 둘러가며 반복해서 말하기 시작했다.
 
 '한국은 가난한 나라였습니다. 100년전 우리 조상들이 강하지 못해 세계를 몰랐고 그래서 기회를 놓쳤습니다. 이제 독일에 와서 라인강의 기적을 배우고 우리도 독일처럼 부강한 나라가 되어 공산국가의 위협에서 자유로운 강국이 되고자 합니다. 제가 어릴 때는 일제시대였지요. 얼마나 배가 고팠는지…'
 
 백영훈 통역관의 회고.
 
 '박대통령은 대한민국이 얼마나 기구하게 살아왔는지를 두 번 세 번 반복하고 있었습니다. 5·16 군사혁명을 시작한 배경에서 일제시대 이야기로 갔다가 6·25때 경험담, 자유당 시절의 이야기에서 다시 일제시대로 두서없이 넘어가는 상황이었습니다. 옆에서 통역하던 제가 민망스러울 정도로 반복되었지만 에르하르트 수상은 시가를 피우면서 끝까지 들어주었습니다. 박대통령의 과거사를 들으며 에르하르트 수상은 감동하는 표정이 역력했습니다만, 반복되는 내용에 민망해진 저는 흐르는 땀을 훔치느라 정신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박정희는 예정된 40분을 혼자서 소진해버리고도 모자랐다. 에르하르트 수상은 비서를 통해 회담 시간을 30분 연장하라고 지시했다. 박정희는 최종적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정리하면서 다시 한번 서독정부의 경제지원을 부탁했다. 에르하르트 수상이 비로소 입을 열었다.
 
 '각하, 일본하고 손을 잡으시지요.'
 
 박정희는 이 말을 통역해 준 백영훈 교수에게 화를 냈다.
 
 '뭐? 돈 좀 꿔달라는데 일본 얘기는 왜 꺼내?'
 
 에르하르트 수상은 박정희의 표정을 통해 감을 잡은 듯 백교수의 통역이 시작되기도 전에 다시 말문을 열었다.
 
 '각하, 우리 독일과 프랑스는 역사상 마흔두 번이나 전쟁을 했소. 그런데 아데나워 수상이 드골과 만나 악수를 하면서 이웃나라끼리 손을 잡았소. 한국도 일본과 손을 잡으시지요.'
 
 박정희 대통령도 지지 않았다. 두 손바닥을 마주치면서 '독일과 프랑스는 서로 대등한 입장에서 싸웠지요'라더니 이번에는 오른 손바닥을 왼 손등 위로 내리치며 '우리는 항상 눌려 지냈습니다'라고 말했다.
 
 '우리는 일본과 대등한 입장에서 싸워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몰래 힘을 키운 일본이 침략했을 뿐입니다. 그래놓고도 지금까지 사과도 한번 하지 않습니다. 이런 나라와 어떻게 손을 잡으란 말입니까.'
 
 '그래요? 일본이 사과는 해야지요. 독일은 프랑스와의 전투에서 단 한 번도 진 적이 없지만 전쟁에서는 독일이 이긴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웃음). 나의 전임자인 아데나워 수상은 참 훌륭하신 분이었습니다. 독일과 프랑스가 그렇게 사이가 나빴는데 그 분은 드골 프랑스 대통령을 만나 악수를 하고 손을 잡았습니다. 각하, 지도자는 과거나 현재가 아니라 미래를 보고 가야 합니다. 두 나라 사이에 협력관계를 만들어야 공산국가로부터의 위협에 대비할 수 있습니다. 일본과 손을 잡으십시오.'
 
 박정희는 다시 오른 손바닥을 왼 손등 위로 포개면서 '이렇게 눌려 싸웠는데도 말이오?'라고 되물었다. 에르하르트 수상은 인자한 표정으로 박정희의 손을 잡으며 말을 이었다.
 
 '예, 각하. 눌려 싸운 것이나 대등하게 싸운 것이나 모두가 과거의 일입니다. 일본과 손을 잡고 경제 발전 하세요. 우리가 뒤에서 돕겠습니다. 그래서 우리 합심해서 살아 갑시다. 우리가 돕겠습니다.'
 
 박대통령은 에르하르트 수상의 말에 감격한 표정으로 수상의 손을 마주 잡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회담이 시작된 지 한 시간 10분이 지나 있었다. 에르하르트 수상은 회담 후 담보가 필요없는 재정차관 2억5000만 마르크 (약 4770만 달러)를 한국 정부에 제공하기로 결정했다.
 
 1964년 12월9일 오후, 에르하르트 수상과 성공적인 정상회담을 마친 박정희는 서독 방문 후 처음으로 홀가분한 기분이 되어 에르하르트 수상이 주최하는 오찬회에 참석했다.
 
 박정희는 오찬식이 끝나자 에르하르트 수상에게 준비해 간 선물을 증정한 뒤 오후 4시 경 숙소로 돌아왔다. 그 사이에 장기영부총리가 에르하르트 수상과 단독회담을 통해 한·독 경제협력과 관련한 구체적인 내용들을 검토하고 서독 정부측의 확답을 받아냈다. 양측은 1965년부터 1967년까지의 한·독 경제협력 3개년 계획에 합의하고 서독측은 한국 면직물 수입쿼터를 100만 마르크에서 200만 마르크로 증대시켰다.
 
 이날 오후 에르하르트 수상은 약식 기자회견을 가지면서 '서독은 한국에 대해 특별한 원조를 할 용의가 있다'고 발표했다.
 
 이날 밤 8시엔 박정희 대통령이 주최하는 만찬이 열렸다. 뤼브케 대통령 부부와 에르하르트 수상 부부 등 서독 정부의 요인들과 기업인 등 150여명이 초청되었다. 만찬장에서는 실내악단이 재독 작곡가 윤이상의 작품 '로랑'을 은은하게 연주하고 있었다.
 
 에르하르트 수상은 명랑한 표정으로 만찬장 분위기를 주도해갔다. 그는 샴페인 글라스를 들고 좌중을 향해 '제가 수상이 되기 전 경제장관으로 있으면서 한국의 경제고문으로 갈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래서 한국의 경제부흥에 참여해 보고 싶었지요'라고 말해 갈채를 받기도 했다. 그는 또 '앞으로 한국 경제재건 문제에 있어서 한국 정부가 저의 개인적인 지식과 도움이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요청에 응할 것입니다'고 했다. 에르하르트는 슈베르트의 '보리수'를 부르자고 제의하여 한·독 합창이 흘러나왔다.
 
 (조갑제출판국부국장기자) (이동욱월간조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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