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자유화 정책의 태동
시장자유화 정책의 태동
1964-65년은 우리나라가 대외개방쪽으로 국가전략의 방향을 확실히 잡은 시기였다. 한일국교정상화, 월남파병, 박정희 대통령의 서독 및 미국방문, 남미이민, 서독광부 및 간호사 파견과 함께 경제정책면에서도 장기영 경제기획원장관 겸 부총리의 지휘하에 개방체제로의 전환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변동환율제의 실시, 수입자유화, 수출주도 정책, 금리현실화, 적극적인 외자도입, 재정안정정책과 물가안정정책.
시장기능을 활성화하는 이런 정책이 성공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전과 달리 미국의 적극적인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일국교정상화와 월남파병에 박정희 정부가 미국의 세계전략에 적극적으로 협조한 대가로서 박정희는 국내정치의 안정을 위한 미국의 협조를 얻었을 뿐만 아니라 경제정책에 대해서도 많은 협조를 끌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1964년 5월에 입각한 장기영에게 시장자유화 정책을 건의한 사람은 재무부 차관을 지낸 김정렴(뒤에 대통령 비서실장)이었다. 김씨는 1964년 초 한국일보 사장이던 장기영과 함께 도쿄에 가서 일본으로부터 어업 및 선박 협력 차관을 도입하는 비밀교섭에 참여했다.
한국은행 출신인 두 사람은 자연히 한국 경제의 진로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나누었다. 개발연대의 경제정책에 크나큰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는 김정렴은 당시로서는 드물게 국제금융에 밝은 사람이었다. 그는 미국 뉴욕 연방준비은행에서 연수, 한국은행 뉴욕사무소 개설요원으로 근무한 뒤 클라크대학에서 경제학 석사과정을 마쳤다. 김씨는 일본통이기도 했다. 일본 오이다고상((대분고상)을 졸업하고 조선은행(한국은행의 전신)에 들어갔다가 구마모도 육군예비사관학교를 나와 히로시마 소재 군관구 사령부에 근무중 원폭투하 때 화상을 입었다.
김정렴은 한국은행 도쿄지점에서 1년간 근무했고 한일회담에도 관계했다. 미-일의 경제사정에 밝은 그는 '한국이 따라야 할 개발모델이 미국식과 일본식 중 어느쪽인가'하는 화두를 품고 다녔다. 그가 내린 결론은 자원이 빈약한 대신 우수한 인력을 가진 일본이 수출입국정책으로 성공한 모델을 한국이 따라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수출대체 산업에 안주하지말고 수입대체를 위한 보호적 요소를 자유화해서 국제경쟁력을 강화하는 동시에 수출지향적 공업화에 착수하고 나아가서는 중화학공업, 그리고 적극적으로는 고도기술산업으로 발전해 나가야 한다'는 요지의 건의서를 만들어 장기영에게 주기도 했다. 장기영은 입각교섭을 받자 김정렴을 불러 주요경제정책에 대한 아이디어를 요약해서 달라고 부탁했다.
그때 국제통화기금(IMF)은 한국측과 연차 협의를 할 때마다 수입대체산업에 대한 보호정책의 시정, 즉 환율과 금리의 현실화, 수입의 자유화, 관세율의 인하 등 소위 '시장자유화정책'을 권고하고 있었다. 김정렴은 IMF의 권고사항이 쓴 약이기는 하지만 이런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결국은 기업의 경쟁력을 강화시키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메모를 밤새워 작성했다.
환율과 금리를 현실화하면 외국차관과 은행돈을 쓰고 있는 기업은 이자부담이 늘어난다. 수입을 자유화하고 관세를 인하하면 수입규제와 관세장벽으로부터 보호를 받고 있던 기업들이 큰 타격을 받게 된다. 과보호를 받고 있던 기업들은 체질개선을 하지 않으면 도산하게 된다. 우리나라가 IMF관리체제하에서 겪은 것과 비슷한 고통이다.
이런 고통과 자구노력은 결국은 기업체질을 향상시킬 것이지만 정부는 경제계의 반발과 정치권의 압력에 직면할 것이다. 표에 민감한 여당도 시장자유화에 반대할 공산이 크다. 이 정책은 중간에 그만두면 큰 혼란을 불러 안한 것만 못하게 된다. 따라서 대통령의 확실한 이해와 지지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김정렴은 메모에서 강조했다.
며칠 뒤 장기영 부총리가 김정렴을 불렀다. 장기영은 '정일권 총리도 있는 자리에서 박대통령에게 시장자유화정책을 설명하고 이 정책에 대한 지지를 약속받았다'고 했다. 장부총리는 '대통령께서는 '경제팀은 언제든지 당신이 원하는대로 구성해주겠으니 기필코 시장자유화정책을 성공시켜라'고 말씀하셨다'고 덧붙였다. 장부총리는 한 달 뒤 박충훈 상공부장관과 의논하여 김정렴을 상공차관에 임명했다.
딱딱하게 보이면서도 유연한 발상의 소유자인 박정희는 시장원리에 대한 이해가 빠른 사람이었다. 그는 1962년에 쓴 '우리 민족의 나아갈 길'의 머리말에서 이렇게 말했다.
<'최대한의 자유, 최소한의 계획'을 원칙으로 경제계획을 완수하여 '한강변의 기적'을 이룩해놓는 것이 승공의 길이다. 우리는 진정한 경제발전이 민주주의적인 자유와 창발성 가운데서만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경제개발을 어디까지나 시장경제의 원리를 바탕으로 깔고 국가에 의한 계획성을 종으로 놓고 추진한다는 소신인 것이다. 박정희에 의한 국가의 개입은 시장원리를 제한하는 데 그 목적을 둔 것이 아니라 시장이 제대로 기능하도록 여러 가지 제도와 관행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그는 이듬해 나온 '국가와 혁명과 나'에서는 '민주주의의 신봉을 견지하는 한, 여론의 자유를 막을 수는 없다. 토론의 자유 속에서 혁명의 구심력을 찾아야 하는 혁명이기 때문에 어렵다'고 썼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원칙을 전제로 한 국가주도의 근대화 전략이었다는 점에서 박정희식은 김일성의 전체주의식이나 필리핀과 파키스탄의 기득권층만을 위한 민주주의와는 차원이 달랐다.
(조갑제출판국부국장기자) (이동욱월간조선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