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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괄타결에서 개별타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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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괄타결에서 개별타결로
 
 1965년에 들어서면서 박정희는 한일국교정상화 회담과 월남파병을 동시에 추진했다. 이해 1월14일 밤 박대통령은 청와대 본관 2층 침실에서 며칠 뒤에 있을 연두교서 발표자료를 만들어 가져온 박상길 대변인을 맞았다.
 
 '수고하였소. 저녁은 어떻게 했소?' '네, 이제 나가 먹겠습니다.'
 
 '그런데 그 월남파병인가…. 밖에서들 뭐라고 합니까?' '우리 처지에서는 공산군과 싸워 실전을 익힐 수 있는 좋은 기회이고 미국은 한번 도와주어 빚을 갚아볼 좋은 기회이고 경제건설에 필요한 달러를 벌어들일 기회도 되고 5000년에 처음으로 남을 도와 파병한다는 기록도 남기는 게 밑지는 장사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묵묵히 듣고 있던 박대통령은 다소 상기된 표정을 짓더니 '관계자들을 부르시오'라고 즉석회의를 소집했다. 박대통령은 뤼브케 서독대통령으로부터 선물받은 포도주를 가져오게 하여 대변인과 함께 마시고 있으니 장관들이 놀란 표정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요정에서 달려온 장관, 잠자리에 들었다가 뛰쳐나온 장관도 있었다. 박대통령은 관계장관들이 다 모였는가 하고 둘러보더니 입을 뗐다.
 
 '월남파병을 결행하기로 하였으니 그리들 알고 각자 필요한 작업에 내일부터 착수토록 하시오.'
 
 박정희가 이날 밤에 말한 월남파병은 파병이 이미 확정된 비전투부대인 비둘기부대에 이어 전투부대도 보내겠다는 뜻이었다. 미국과 월남정부가 공식적으로 전투부대 파병을 요청하기 전이었다. 박대통령은 그런 공식요청이 언제 오는가 하고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는 형편이었다.
 
 이해 7차 한일회담은 아슬아슬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1964년12월에 급사한 일본측 수석대표 스기미치스케의 후임이 된 다카스키 신이치는 평생을 미쓰비시그룹에서 일해온 재계의 거물이었다. 그는 1965년 1월7일 외무성 출입기자들과 회견하는 자리에서 망언을 했다.
 
 '조선통치에 대하여 한국측은 사죄를 요구하고 있으나 우리로서도 할 말은 있다. 우리는 조선을 보다 풍요롭게 만들려고 지배한 것이다. 지금 조선의 산들은 벌거숭이가 되어 있는데 이는 조선이 일본에서 이탈한 때문이다. 일본이 한 20년간 더 지배했으면 좋았을 뻔했다. 창씨개명은 조선인을 동화시켜 일본인과 같은 대우를 해주려고 한 배려였다.'
 
 이런 발언이 일본공산당 기관지 '적기(아카하다)'에 보도되었다. 김동조 주일대사 겸 수석대표는 이 내용이 한국신문에 보도되면 회담이 결렬되고 말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는 우시바(우장)차석대표에게 전화를 걸어 '사건이 확대되면 우리로서도 어쩔 수 없다. 그러니 다카스키 대표가 한국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이 발언을 무조건 부인하도록 하라'고 했다.
 
 우시바도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다카스키로 하여금 1월18일 한국기자들과 만나 자연스럽게 자신의 발언을 부인하도록 했다. 다카스키는 이날 본회의 직후 한국언론의 주일특파원들과 대화하면서 태연스럽게 말했다.
 
 '내가 36년간의 조선통치가 한국측에 유익했다는 발언을 한 것처럼 평양의 노동신문이 보도했는데 터무니 없는 날조이다. 이는 공산주의자들이 회담을 방해하려고 꾸민 사건이다.'
 
 다음날 동아일보는 이런 다카스키의 변명에도 불구하고 그의 중대실언 내용을 크게 보도했다. 20일 본회의에서 김동조 수석대표는 이 기사를 읽은 다음 '이 내용이 사실이라면 회담의 계속 여부도 재검토하지 않을 수 없다'고 경고했다. 다카스키 수석은 보도내용을 부인하는 문안을 낭독함으로써 이 발언파문은 수습되었다. 이 문안은 김동조 대사가 미리 일본측에 요구하여 작성된 것이었다.
 
 이동원 외무장관은 국내의 반일감정을 순화시키기 위해선 일제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일본정부의 공식 사과를 받아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1964년 10월 김동조 대사가 일본에 부임할 때 '요시다 전 수상 같은 거물이 한국에 와서 사과를 하도록 노력해 줄 것'을 당부했었다. 김동조대사는 일본에서 시나외상을 만나 방한을 요청하고 주일 미국대사 라이샤워를 만나서도 측면지원을 당부했다.
 
 한일회담 한국측 수석대표를 겸한 김대사는 종래의 일괄타결 전략을 수정하여 문제별, 위원회별 개별타결방식으로 전환했다. 청구권, 어업, 기본조약, 재일동포 문제가 한일회담의 4대 의제였다. 청구권 문제는 1962년의 김종필-오히라 메모로 그 대강이 결정되었다. 김대사는 기본조약을 마무리하면 2개 문제가 해결되므로 국교정상화를 기정사실로 만들면서 조기타결로 가져갈 수 있다고 판단했다. 각 분과위원회별로 실무선에서 합의를 해보고 합의가 되지 않는 것들은 막후교섭 또는 정치회담에서 타결하기로 한 것이다. 일본도 이런 수순에 동의했다.
 
 (조갑제출판국부국장기자) (이동욱월간조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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