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식이 싫은 대통령
격식이 싫은 대통령
대통령 주재의 월례 수출진흥확대회의는 한국만이 가진 독특한 협의체로서 외국에서도 모방하려고 했으나 성공한 나라는 별로 없다고 한다. 이 회의에 박정희 대통령은 반드시 참석하여 수출진도를 점검하고 애로사항을 즉석에서 해결해주었다. 주무부서인 상공부가 이 회의에 수출지원책을 내어놓으면 웬만한 것은 대통령 이름으로 받아들여져 즉각 시행되곤 했다.
경제기획원이나 재무부는 하급 부서인 상공부의 뒤치닥거리를 한다고 불평하기도 했으나 국정의 우선순위에서 수출을 항상 윗자리에 놓는 대통령 때문에 기관이기주의가 발붙일 틈이 없었다.
이즈음 어느날 박대통령은 수행원들과 함께 서울 구로공단내의 한 공장을 시찰했다. 박대통령은 10대 소녀 공원이 열심히 손을 놀리고 있는 등뒤로 다가가 가만히 지켜보고 있다가 덥석 소녀의 손을 잡으면서 말했다.
'네 소원이 무엇인가?'
소녀는 무슨 잘못이라도 저지른 듯 겁에 질린 표정이었다. 대통령 수행원들이 '겁내지 말고 소원이 있으면 말해봐'라고 했다. 소녀는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말했다.
'저도 제 또래의 아이들처럼 교복을 한번 입어보고 싶습니다.'
갑자기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강직한 외모의 뒤에 다정다감한 내면을 지닌 박대통령은 훗날 산업체의 소년소녀 근로자들을 위한 특별학급을 만들게 된다.
박충훈 장관은 대통령과 함께 한 회식자리에서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얽힌 일화를 하나 소개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백악관으로 들어갈 때 언론인 출신 한 사람을 식객처럼 데리고 갔다는 것이다. 이 사람은 반년이 넘도록 벙어리처럼 말 한 마디 하지 않았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말했다.
'이제 당신이 여기 들어온 지도 여섯 달이나 되었으니 무슨 말이든 한 마디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 사람은 '예, 알겠습니다'라고 하더니 다음날 종이에다 서너 자 적은 것을 들고 와서 바쳤다. 대통령이 받아서 보니 'WELL'이라 쓰여 있었다.
'미국 대통령의 말 한 마디는 세계에 영향을 끼칩니다. 그런데 각하께선 너무 쉽게 예스, 노를 말합니다. 앞으로 누가 물으면 먼저 WELL (글쎄요)이라고 말해놓고 생각을 가다듬은 후에 가부간의 대답을 하는 게 낫겠습니다.'>
이 말을 들은 박대통령은 '나 보고 들으라고 한 이야기구먼'이라고 했다. 박장관은 술에 약해 김정렴차관을 종종 데리고 다녔다. 박장관은 '여기 김차관은 장관 대신 술 마시는 것을 도맡다 보니까 우리 부에서는 야간장관이라 불립니다'라고 농담을 했다. 박대통령은 '좋아요, 그러면 내가 김차관을 야간장관으로 임명하겠어요'라고 역시 농으로 응수했다.
박대통령은 격식없는 이런 술자리는 좋아했으나 공식적인 만찬이나 파티는 싫어했다. 그런 만찬을 끝낸 어느 날 박대통령은 정치부 기자 출신의 젊은 공화당 의원 이만섭(현재 국민회의 대표)를 따로 부르더니 '우리끼리 한잔 하자'면서 청와대로 데려갔다.
'난 말이야 저런 파티가 싫어. 오늘 이의원도 봤겠지만 정치인과 악수를 하면 괜히 내 귀에다가 입을 대고 속삭이면서 손을 놓아주지 않는 친구들이 있단 말이야. 할 말도 없으면서 여러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과시하려고 그러는데 양치질이나 제대로 하고 그러면 밉지나 않지.'
대구의 한 요정에서 있었던 일화. 모 국회의원이 대통령을 담당한 여자 종업원에게 농담을 했다.
'니, 각하하고 여러 번 했제?'
순진한 종업원이 대통령에게 쪼르르 달려가 일러바쳤다. 듣고난 박대통령은 그 국회의원을 향해서 소리쳤다.
'그래 임마, 했다. 그러니 니 형수한테 술 한 잔 올려라!'
이 무렵의 박정희는 1970년대의 그와는 많이 달랐다. 40대 후반의 젊은 대통령은 '선거로 뽑힌 대통령'이란 정당성을 근거로 하여 야당과 언론의 비판에 당당하게 논리적으로 대응했다. 원래 격식을 싫어하는 그는 대통령직이 부여하는 최소한의 의전도 부담스러워했다. 이 무렵 찍은 사진들을 보면 대통령과 합석한 측근 인사들도 대통령의 존재를 별로 의식하지 않고 자유롭게 담소하고 담배를 피우는 모습이다.
박대통령은 한일회담이나 월남파병과 같은 중대사를 결정할 때는 충분한 토론을 거치게 했다. 공화당이 3분의 2에 육박하는 압도적인 의석을 갖고 있었으나 박대통령이 야당에게 끌려다닌다는 불만을 털어놓을 정도로 국회 활동은 활발했다. 박대통령의 이런 유연성은 자신감의 반영이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그는 미국이 원하는 월남파병과 한일국교 정상화를 정력적으로 추진함으로써 미국의 지지를 확보했다. 이는 반정부 활동을 벌이는 야당과 학생들에 대한 미국의 전통적인 지지가 철회된 것을 의미했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 월남전선에서 한국군이 철수하는 것을 계기로 하여 한미간의 그런 고리가 끊어진다. 박대통령의 영구집권을 가능하게 한 유신체제의 선포와 함께 미국 정부는 야당-학생-지식인 사회의 박대통령 비판을 지원하는 형국으로 바뀐다.
(조갑제출판국부국장기자) (이동욱월간조선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