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과 과학기술
대통령과 과학기술
1965년 5월18일 백악관에서 박정희-존슨 제2차 정상회담이 끝난 직후 발표된 양국 공동성명서는 '월남에 대한 지원 문제에 두 나라가 협조하기로 합의했다'고만 밝혀 전투병력 파견 문제가 논의된 것을 감추었다. 성명의 요지는 '한일 국교정상화 이후에도 대한 원조 계속, 군원이관 계획의 재검토, 주한미군 지위협정의 원칙 합의, 그리고 공업 기술 연구소 설립'이었다.
<양국 대통령은 교사로서의 과거를 상기하면서 양국의 교육 문제에 대해 논의했다. 박대통령은 한국에 공업기술 및 응용과학연구소를 설치할 가능성을 검토하기 위하여 그의 과학고문을 한국에 파견하겠다는 존슨 대통령의 제의를 환영했다.>
한국의 공업화를 과학기술적으로 뒷받침하게 되는 한국과학기술연구소 (KIST)의 설립으로 이어지는 이 성명의 중요성을 제대로 안 기자는 별로 없었다. 이 연구소의 초대소장이 되는 최형섭(뒤에 과학기술처장관) 당시 원자력 연구소장에 따르면 동아일보의 김진현 경제부 차장만이 제대로 기사를 썼다는 것이다.
<워싱턴에서 전해오는 그 많은 '파격적'이고 '이례적'인 의전대접에도 불구하고 경제분야 원조에선 파격도 이례도 없었다. 한 가지 파격이 있었다면 한국정부가 전혀 제안도 준비도 한 바 없음에도 불구하고 존슨 대통령이 먼저 제안한, 공업기술 및 응용과학연구소의 설치 가능성을 검토할 과학고문의 파견이다.>
이 기사를 쓴 김진현 기자는 그 25년 뒤에는 과기처 장관이 된다. 군대, 경제, 과학은 보통 동반발전한다. 강력한 상비군을 유지하려면 경제력이 커야 하고 그럴려면 과학기술의 뒷받침이 있어야 한다. 포병출신인 박정희는 과학기술을 이런 유기적 관계 속에서 파악한 사람이었다. 박대통령의 과학정책을 지휘한 사람중에는 5년간 과학기술연구소장, 7년간 과학기술처장관을 지낸 최형섭 박사가 중심인물이었다. 그는 원자력 연구소장으로 있을 때 대한화학회지에 캐나다의 과학기술진흥정책에 대하여 논문을 쓴 적이 있었다.
1964년말 한준석 경제비서관이 '대통령께서 그 논문을 읽었는데 직접 설명 좀 해주시오'라고 했다. 그래서 최박사는 대통령, 국무총리, 장관들이 참석한 자리에서 과학정책에 대해서 설명하고 질문을 받기로 했다. 박대통령이 물었다.
'최박사, 우리나라의 과학기술을 어떻게 하면 좋겠소?' '과학기술을 발전시키려면 무엇보다도 과학교육을 바꾸어야 합니다. '아는 교육'에서 '하는 교육'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자격을 따는 교육이 아니라 문제해결능력을 갖추는 교육이 필요합니다. 공업화를 하는 데 기술을 아는 사람도 없고, 기술을 어디서 가져와야 된다는 것도 모르고, 기술을 만들어낼 줄도 모르는 지금으로서는 기업과 학계를 연계하는 어떤 매개체가 필요합니다.'
최형섭 박사에 따르면 박대통령은 방미 한 달 전에 연구소장들을 모아놓고 리셉션을 베푼 적이 있다고 한다. 이 자리에서 박대통령은 '스웨터를 만들어 2000만달러나 수출했다'고 대견해하더란 것이다. 최형섭이 찬물을 끼얹었다.
'그것은 참 기특한 일입니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그런 일만 하겠습니까. 일본은 이미 매년 10억달러어치의 전자제품을 만들어 수출하고 있습니다. 그런 힘은 어디서 생겼겠습니까. 바로 기술개발입니다.'
박대통령은 미국에 갈 때 기업과 기술을 연결시켜주는 매개체로서 과학기술 연구소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었다고 한다. 최형섭 박사가 나중에 김현철 주미한국대사로부터 들은 바에 따르면 당초 존슨 대통령의 과학고문은 우리 쪽에 공과대학을 만들어주겠다는 제안을 했으나 박정희 대통령이 대학 대신에 연구소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는 것이다.
과학기술연구소 설립에 합의한 한 달 뒤 존슨 대통령은 약속대로 과학보좌관 도널드 F. 호니그 박사와 전문가들을 한국으로 보내 최형섭 박사가 소장으로 있던 원자력연구소와 금속종합연구소를 둘러보았다. 호니그 박사는 방한하기 전에 최형섭 박사에게 '연구소 설립의 기본계획을 수립하기 위한 조사를 주관할 미국 연구소는 장래 한국연구소와 자매결연을 맺어야 하는데 어떤 연구소가 좋다고 보느냐'고 물었다.
최박사는 '미국측 생각은 어떠냐'고 물었더니 호니그 박사는 '벨 연구소를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최박사는 '벨 연구소는 세계적인 명성을 가진 연구소이지만 막대한 연구비를 들여 기초연구부터 하는 귀족적인 연구소로 우리 실정에는 맞지 않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에겐 기업을 도와서 그들이 필요한 연구를 해주는 바텔 연구소가 바람직하다. 공업과 직결되는 연구를 할 수 있는 장사꾼 같은 계약연구소가 필요하다'고 호니그 박사에게 연락했다고 한다.
벨 연구소는 장기적인 안목으로 기초과학에 막대한 투자를 하여 얻어진 연구성과를 오랜 기간에 걸쳐 상품화하는 곳인데 반해 바텔 연구소는 수탁연구중심으로서 그때그때 필요한 연구 결과를 기업에 적용시켜 나가고 있어 공업화 초창기의 한국에는 보다 적당하다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박대통령은 1966년 2월3일 최형섭 박사에게 한국과학기술연구소의 초대소장 임명장을 주는 자리에서 두 가지 당부를 했다.
'예산은 내가 책임지고 마련해 줄테니 구차하게 소장이 경제기획원에 들락거리지 마시오. 그리고 인사청탁을 절대로 받아들이지 마시오. 최박사는 고집이 세서 남의 말을 잘 안듣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나 그래도 혹시 거북한 일이 있으면 나한테 와서 말해주시오.'
(조갑제출판국부국장기자) (이동욱월간조선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