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출 사령탑의 면면
수출 사령탑의 면면
1965년은 우리나라 수출이 섬유공업을 중심으로 가속도가 붙기 시작한 해였다. 수출전선의 최고 사령관은 박정희 대통령이고 야전사령관은 박충훈 상공장관, 부사령관은 김정렴 차관, 주공사단장은 오원철 공업1국장이었다. 김정렴-오원철 팀은 경공업 시대인 1960년대에 이어 중화학공업 시대도 열었다. 두 사람은 1970년대엔 대통령 비서실장과 방위산업 및 중화학공업 담당(중화학공업기획단 단장 겸임) 제2경제수석 비서관 사이로서 한 시대를 이끌었다.
박충훈 장관은 공군소장 출신, 김정렴은 일제 시대 예비사관학교 출신, 오원철은 서울대 화공과를 졸업한 뒤 공군에 입대, 소령으로 제대한 경력의 소유자들이었다. 장교-이공계 출신 엘리트가 한국 수출전략의 기본을 짰다는 것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실천력, 계획성, 과학정신을 공유하고 있는 군-이공계 출신들의 영향력이 근대화 과정에 많이 반영된 것은 박정희 대통령 자신이 포병 출신으로서 사고방식이 기본적으로 이공계적인 면이 강했던 것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 1998년 월간조선 8월호의 조사에 따르면 대학입학 정원에선 이과가 52%로서 문과의 48%를 앞섰지만 김대중 정부 부처의 국장급 이상 공무원 가운데서는 이과출신이 21%에 지나지 않았다. 국가 지도부가 과학정신에 약하면 정책이 중구난방의 주먹구구식으로 흐를 위험성이 있다.
오원철은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성공한 엔지니어 출신 정책입안자로 꼽힌다. 그는 기발하고도 파격적인 발상으로써 중화학공업 건설을 추진했다. 1950년대에 오씨는 시발자동차 공장장, 국산자동차주식회사 공장장을 지내면서 한때는 기름 없이 달리는 자동차 연구에 골몰했던 적도 있었다. 이 시절 이승만 대통령은 기름 없이 달릴 수 있는 자동차를 개발하면 온갖 특혜를 다 주겠다는 엉뚱한 공약을 한 적이 있었다. 이대통령은 가끔 북진통일론을 이야기했는데 그때마다 한국내에서 석유공급과 판매를 독점하고 있던 코스코란 미국의 석유저장회사가 미국 대사관의 지시에 따라 석유시판을 중단하는 방식으로 압력을 넣곤 했다. 화가 난 이승만 대통령이 이상한 방법으로 반발한 것이다.
5·16 군사혁명 직후 최고회의 기획위원회 조사과장으로 징발되어 경제개발계획에 참여하게 되었던 오원철은 1965년 초 대통령의 상공부 초도순시 때 섬유공업을 중심으로 하는 수출전략을 보고했다. 5·16 뒤 선진 행정기술의 군사문화가 행정부에 깊게 침투하면서 브리핑 또는 차트 보고가 중요해졌다. 박대통령 앞에서 이런 보고를 잘해서 출세한 사람도 있는가 하면 작은 실수로 경력을 망친 사람이 생겨나기도 했다. 자연히 장관은 보고자료에 신경을 많이 쓸 수밖에 없었다.
박충훈 장관은 기획실장이 종합한 보고자료를 김정렴 차관에게 읽어보라고 주었다. 김차관은 내용을 훑어보더니 '잠시 시간을 주십시오'하고는 사라졌다. 두 시간 뒤에 나타난 김차관의 손에는 자신이 완전히 다시 쓴 원고가 들려 있었다.
부하들이 박대통령한테 보고를 할 때는 사인펜으로 백지에 크게 글씨를 쓴 다음 이를 한장 한장 넘기면서 했다. 설명하는 사람이 잊어먹지 않도록 차트 한 구석에다가 연필로 깨알처럼 써두어도 넘기고 나서 '아차!'하고 후회하는 수가 많았다. 막대기를 절도 있게 차트에 갖다대면서 보고하는 사람을 돕기 위해서 보조원이 붙어 서서 차트를 넘기는 일을 맡는데 가끔 이를 찢어놓는 실수를 범해 혼이 나기도 했다.
1965년 초 박대통령의 상공부 연두순시 때 오원철 국장은 '섬유공업을 중심으로 경공업 제품이 총수출 물량의 50%(중공업제품은 10%)를 담당하도록 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보고했다. 그는 '이렇게 해서 섬유공업이 발달하면 합성섬유(나일론, 아크릴, 폴리에스테르사 등)의 수요가 증가한다. 이를 수입하면 막대한 외화가 소요되니 국산화해야 한다. 즉 합성섬유공업을 1966년 후반기부터 육성해야 한다. 합성섬유공업의 원료를 공급할 석유화학공업 건설은 1967년에 착수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 단계적 발전전략은 한 단계의 수요증가를 압축해가다가 폭발 직전에 다음 단계로 밀고가는 방식이었다. 그 도약의 타이밍을 잘 잡은 것이 우리나라 섬유-석유화학공업 발전의 한 비결이기도 했다.
박대통령은 이날 상공부의 수출전략 보고에 만족하여 저녁에 상공부 국장급 이상을 청와대로 초청하였다. 그러나 브리핑 준비로 밤을 세웠던 국장들이 각자 뿔뿔이 흩어진 뒤였다. 집에 전화가 없는 사람들이 많아 소집이 되지 않았다. 며칠 뒤 박대통령은 상공부에 격려용 돈봉투를 내려보냈다.
수출전선의 사령탑이었던 상공부의 요직에 있었던 면면들을 본다. 무역부문에서는 이철승 상역차관보, 김우근 상역국장, 심의환 상정과장이 트리오였다. 법과 규정에 밝은 이철승은 결재를 까다롭게 해 뒷탈을 없앴다. 김국장은 추진력이 강하고 부하들을 잘 감싸주었다. 심의환은 산골인 경북 청송출신의 고등고시 합격자로서 작은 몸집에 호주가이고 친교가 넓었다. 이 세 사람은 이철승이 차관으로 승진하면 김우근은 차관보로, 심의환은 상역국장으로 대를 잇는 식으로 움직였다.
심의환은 나중에 총무처 장관으로 일하다가 박대통령보다 며칠 먼저 세상을 떴다. 박대통령이 피살되기 하루 전에 그가 마지막으로 쓴 편지가 심장관의 미망인에게 보내는 위로 서신이었다. 상역국 수출진흥과장 자리에는 문기상(뒤에 차관보 역임), 계장으로는 홍성좌(차관-무역협회 부회장 역임)-이동훈(공업진흥청장-수출보험공사 사장 역임) 같은 사람들이 뛰었다.
(조갑제출판국부국장기자) (이동욱월간조선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