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인력의 진출
여성인력의 진출
상공부 공업1국장 오원철은 한국의 중소기업을 수출업체로 전환시키는 전략을 짜는 과정에서 대만의 중소기업 연구를 위해 현지를 방문했다. 그는 그곳의 중소기업은 우리나라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생리를 가진 것을 발견했다. 그들은 정부에 기대하는 것도 없고 정부도 그들의 업무에 간여하지 않았다. 그만두는 것도 간단하고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는 절차도 간단하다.
대부분의 중소기업체가 가족회사이다. 식구가 종업원이다. 학생인 자녀들은 방과후에 회사 일을 돕는다. A라는 사람이 창업을 하면 친구들이 모여 의논을 하고 도와주자는 결정을 하면 친구들이 돈을 모아서 출자를 한다. 이 출자금엔 이자가 없고 나중에 원금만 갚으면 된다. 은행에서도 약간의 담보만 있으면 대출받기가 쉽다.
이윤을 남기면 이 은행 빚부터 갚는다. 이것이 그들의 국민성이다. 다시 공장을 확장하고자 할 때는 은행 빚을 거의 다 갚았을 때 은행을 찾는다. 은행의 융자조건은 사업성이다. 연줄이나 압력이 통하지 않는다. 의리와 신용의 세계이다. 빚지는 것을 싫어하니 기업의 내실은 튼튼할 수밖에 없다. 이런 강점은 아시아를 휩쓴 1997년의 금융위기에서 실증되었다.
오원철 국장은 대만의 중소기업을 시찰하고 돌아와서는 그들의 장점을 업계에 소개하면서도 내심으로는 우리로서는 한계가 있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그저 담보 범위 안에서 융자나 잘 되었으면 하는 생각이었다는 것이다. 당시 우리 중소기업의 문제는 자금력이 약하고 팔 곳이 좁다는 점이었다.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상공부가 전국의 약2000개 중소기업을 선정하여 그들을 상대로 수출업체로 전환할 업체를 모집한 결과 1965년 말 542개 업체가 응모했다.
이들 업체에 대해서는 '수출품 생산 지정업체'란 간판을 달게 했다. 자부심부터 심어주자는 뜻이었다. 오원철 국장은 생산성본부에 맡겨 '중소기업에게 어떤 업종을 수출산업으로 육성하도록 지도할 것인가'를 연구하게 했다.
그 선정기준은 비교생산비가 외국에 비해서 낮을 것, 외화가득률이 높을 것, 고용률이 높을 것, 수출실적의 증대가 기대되는 것, 그리고 해외시장성이 좋은 것. 이 기준에 따라 13개 품목이 선정되었다. 생사 및 견사, 견직물, 도자기제품, 고무제품, 라디오 및 전기기기, 어패류 및 양송이 통조림, 모제품, 합판, 면직물, 의류, 피혁제품, 공예품 (갈포벽지 포함), 잡화류(양식기 및 가발).
이 품목을 특화산업 혹은 특화 품목이라 부르기로 했다. 특화란 '수출업종으로 전환하여 특별히 중점 육성키로 한 업종'이란 뜻이었다. 오원철 공업국장은 또 수출업체로 전환한 중소기업체에 대한 정부의 지원체제를 갖추었다. 그는 '각 과에서는 외국기계의 카탈로그를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구하라. 그 기계의 내용을 파악하여 업자에게 알려주는 것이 제일 도움이 된다. 중소기업 사장들은 공장을 상호방문하도록 하라. 일견이 백문보다 낫다'고 했다.
지방 행정조직의 상공과에 대해서는 연도별 수출계획서를 작성하고 매월 실적을 보고토록 했다. 연말에는 청와대에 지방별 수출실적이 보고되니 시장, 도지사들이 뛰지 않을 수 없었다. 1966년의 경우 전국의 시도에서 작성한 중소기업 수출목표는 총 5000만 달러였다. 이 해의 수출목표는 2억5000만 달러였고 그 가운데 공산품은 1억5872만 달러였다. 수출 공산품의 약 3분의 1을 중소기업에서 해내기로 했다는 얘기이다.
중소기업이 수출전선에서 맹활약을 하는 가운데 여성 인력들이 경제개발에 동원되기 시작했다. 이때는 가족계획이 본격적으로 실시될 무렵이었다. 가족부양의 부담이 줄어든 많은 주부들도 중소기업의 생산현장으로 몰려갔다. 가발과 함께 초창기의 중소기업 수출을 주도한 것은 홀치기였다. 일본어로는 시보리라고 하는데 일어를 쓰는 것이 뭣하다고 해서 만든 용어였다.
명주는 원래 얇은 천인데 이 천을 좀 두텁게 보이게 하면서 각종 문양을 짜넣고 염색한 것이 시보리이다. 이 문양은 기계로 짜넣는 것이 아니라 수공업적으로 한 바늘 한 바늘씩 일일이 짜넣어야 하는 것이다. 1964년에 홀치기 제품은 약 9만 달러어치가 일본으로 수출되었다. 다음해엔 수출액이 115만 달러, 66년엔 287만 달러, 67년엔 1442만 달러, 69년엔 2587만 달러에 달했다. 이 해엔 전국에서 11만2000명의 여성들이 이 홀치기에 종사하고 있었다. 이렇게 수출이 늘어나니 생사공급을 위해서 양잠을 장려하게 되었다.
중소기업의 수출전환을 실무적으로 주도했던 오원철 국장은 이렇게 말했다.
<중소기업의 수출전선에서 필요한 노동력은 가냘픈 처녀들의 손이었다. 머리카락을 판 것도 가난한 처녀들이요, 이 머리카락으로 가발을 만든 것도 이들이었다. 홀치기로 밤을 새운 것도 여자들이었다. 우리나라는 가난한 나라이니 여자가 살림을 꾸려갈 수밖에 없었던 시절이다. 남자들에게는 아직 일감이 없었다>(오원철 씀 '한국형 경제건설 - 엔지니어링 어프로치' 제2권에서 인용).
(조갑제출판국부국장기자) (이동욱월간조선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