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의 죽음
이승만의 죽음
식민지와 지배국 사이로 맺어졌던 한일관계가 대등한 주권국가 사이로 새 장을 연 1965년 6월 22일 서울시내는 1만여 명의 학생들과 야당인사들이 참여한 '굴욕외교 규탄 시위'로 최루탄-곤봉-삐라가 난무하는 수라장으로 변했다. 다음날 밤8시 청와대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라디오 및 텔레비전으로 중계된 연설에서 금속성 목소리로 특별담화를 읽어내려갔다. 이 담화문은 박대통령의 대일관을 잘 보여준다.
그는 패배주의적인 대일관을 비판하면서 자신의 소신을 강한 어투로 표현했다.
'나는 우리 국민 일부중에 한일교섭의 결과가 귤욕적이니 저자세니 심지어 매국적이라고까지 극언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그들의 주장이 정부를 편달하고 정부가 하는 교섭의 입장을 강화하는 데 도움도 될 수 있으리라는 점에서 이것을 호의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이 진심으로 우리가 또 다시 일본의 침략을 당할까 두려워하고 경제적으로 예속이 될까 걱정을 한 데서 나온 것이라면 나는 그들에게 묻고싶습니다.
어찌하여 그들은 그처럼 자신이 없고 피해의식과 열등감에 사로잡혀 일본이라면 무조건 겁을 집어먹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같은 비굴한 생각, 이것이 바로 굴욕적인 자세라고 지적하고 싶습니다. 일본사람 하고 맞서면 언제든지 우리가 먹힌다는 이 열등의식부터 우리는 깨끗이 버려야 합니다. 우리의 근대화 작업을 좀먹는 암적인 요소는 우리들 마음 한구석에 도사리고 있는 패배주의와 열등의식 및 퇴영적인 소극주의, 바로 이것입니다.
나는 이 기회에 일본국민들에게도 한 마디 밝혀둘 일이 있습니다. 과거 일본이 저지른 죄과들이 오늘의 일본국민이나 오늘의 세대들에게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일본은 역시 믿을 수 없는 국민이다 하는 대일 불신감정이 우리 국민들 가슴속에 또 다시 싹트기 시작한다면 이번에 체결된 모든 협정은 아무런 의의를 지니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이 기회에 거듭 밝혀두는 바입니다.'
도쿄에서 조인식을 마친 다음날 귀국한 이동원 외무장관은 역사적 문서를 들고 청와대로 들어갔다. 박대통령은 두 손을 서류에 얹고는 흐뭇한 표정으로 한동안 들여다보다가 독백처럼 말하더란 것이다.
'대체 이 서류 몇 개를 가져오는 데 몇년이 걸린 건가….'
연하구 외무부 아주국장이 '자유당 시절부터 햇수로 15년입니다'라고 했다.
'15년이라, 그것 참, 그렇지만 앞으로 150년이건 1500년이건 잘 돼야 할텐데….'
1965년 7월19일 하와이 호놀룰루의 마우나라니 정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던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 양자 이인수, 재미동포 최백렬이 지켜보는 가운데 운명했다. 향년 90세. 의식을 잃은 지 1년이 넘은 그는 큰 숨을 한번 몰아쉬고는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유언을 남길 처지가 아니었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눈물을 닦으면서 이인수에게 '절대로 남 앞에서는 눈물을 보이지 말라'라고 당부했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늘 들고 다니던 팬암항공사 상호가 찍힌 낡은 쇼핑백에 성경과 찬송가를 담아 들고는 병실을 나섰다. 밖에서 기다리던 사람들에게 간단한 인사를 하고 여사가 떠난 뒤 장의사 사람들이 달려왔다.
이승만 전 대통령을 마지막으로 위문한 정부요인은 이동원 외무장관이었다. 그는 넉달 전 미국방문을 마치고 귀국하는 길에 정양원을 찾았다. 이 전 대통령은 사람을 전혀 알아보지 못한 채 바다가 보이는 창가에 누워 있었고 간호사를 고용할 돈도 없던 프란체스카 여사가 소파를 침대처럼 쓰면서 옆에서 간병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장관이 돌아와 박대통령에게 이승만의 처지를 전하면서 '프란체스카 여사의 부탁입니다만 머지 않아 돌아가시게 될 터인데 고국에서 묻힐 수 있게 해달라고 합디다' 라고 보고했다. 대통령은 깊은 생각에 잠긴 채 묵묵부답이었다.
6월21일 호놀룰루 한인 기독교회의 영결식장에서 말년의 이승만과 가장 가깝게 지냈던 미국인 친구 보스윅은 고인을 덮은 베일을 걷어낸 뒤 이마를 만지면서 울부짖듯이 말했다고 한다(이인수 증언).
'나는 자네를 알아, 나는 자네를 알아. 자네가 얼마나 조국을 사랑하고 있는지, 자네가 얼마나 억울한지를 내가 잘 안다네. 이 친구야, 그 일 때문에 자네가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바로 그 애국심 때문에 자네가 그토록 비난을 받고 살아왔다는 것을 내가 잘 안다네, 이 친구야….'
한 시간 가량 걸린 영결예배가 끝나자 영구차는 하와이 경찰의 경호를 받으면서 히컴 공군기지로 향했다. 살아서 귀국하는 것을 막았던 박정희 정부는 죽어서 귀국하는 것은 허용했다.
국내에서는 장례절차를 두고 논란이 빚어졌다. 국장, 국민장, 사회장, 또는 가족장, 어느 쪽으로 할 것인가. 4·19혁명 직후 하야한 이승만의 뒤를 이어 과도정부를 이끌었던 허정 전 수반은 '무엇보다도 아쉬웠던 것은 이 정부가 이박사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아 그분이 고국에서 눈을 감지 못했다는 점이다'라고 말하면서 '장례식이나마 국장으로 했으면 한다'고 했다.
김영삼 민중당(민정당과 민주당이 합당하여 만든 야당) 대변인은 '적잖은 정치적 과오가 있긴 하지만 평생을 조국의 독립투쟁에 몸바쳐왔으며 초대 대통령을 지냈다는 것을 감안하여 전국민과 더불어 깊은 애도의 뜻을 표한다'고 했다. 4월혁명 동지회 등 일부 단체에선 국장, 국민장, 사회장 그 어느 것도 안된다면서 반발하기 시작한다.
(조갑제출판국부국장기자) (이동욱월간조선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