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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인을 보내는 거인의 조사
  거인을 보내는 거인의 조사
 
 거인을 보내는 거인의 조사
 
 1965년 7월27일 오전 이승만 전 대통령의 유해를 실은 영구차는 서울 시내를 가로질러 제1한강교를 건넌 뒤 국립묘지에 도착했다. 국립묘지에 안장되기 전에 간단한 영결식이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조사는 정일권 국무총리가 대독했다.
 
 독립-건국의 거인을 조국 근대화의 거인이 격조 높은 문장으로써 평가하고 애도하면서 역사의 장으로 떠나보내는 이 조사는 이승만을 '독립운동의 원훈이요 건국대통령'으로 지칭하면서 시작된다.
 
 <돌아보건대 한 마디로 끊어 파란만장의 기구한 일생이었습니다. 과연 역사를 헤치고 나타나 자기 몸소 역사를 짓고 또 역사 위에 숱한 교훈을 남기고 가신 조국근대의 상징적 존재로서의 박사께서는 이제 모든 영욕의 진세인연을 끊어버리고 영원한 고향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나 생전의 일동일정이 범인용부와 같지 아니하여 실로 조국의 명암과 민족의 안위에 직접적으로 연결되었던 세기적 인물이었으므로 박사의 최후조차 우리들에게 주는 충격이 이같이 심대한 것임을 외면할 수 없습니다.
 
 일찌기 대한제국이 기울어가는 것을 보고 용감히 뛰쳐나서 조국의 개화와 반제국주의 투쟁을 감행하던 날, 몸을 철쇄로 묶고 발길을 형극으로 가로막던 것은 오히려 선구자만이 누릴 수 있는 영광의 특전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일제의 침략에 쫑겨 해외의 망명생활 30여 성상에 문자 그대로 혹은 바람을 씹고 이슬 위에 잠자면서 동분서주로 쉴 날이 없었고 똑 혹은 섶 위에 누워 쓸개를 씹으면서 조국광복을 맹서하고 원하던 것도 그 또한 혁명아만이 맛볼 수 있는 명예로운 향연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마침내 70 노구로 광복된 조국에 돌아와 그나마 분단된 국토 위에서 안으로는 사상의 혼란과 밖으로는 국제의 알력 속에서도 만난을 헤치고 새 나라를 세워 민족과 국가의 방향을 제시하여 민주한국독립사의 제1장을 장식한 것이야말로 오직 건국인만이 기록할 수 있는 불후의 금문자였던 것입니다.
 
 (중략). 그러나 집권 12년의 종말에 이르러 이미 세상이 다 아는 이른바 정치적 과오로 인하여 살아서 역사의 심판을 받았던 그 쓰라린 기록이야말로 박사의 현명을 어지럽게 한 간신배들의 가증한 소치였을망정 구경에는 박사의 일생에 씻지 못할 오점이 되었던 것을 통탄해마지 못하는 바입니다. 하지만 오늘 이 자리에서 다시 한번 헤아려보면 그것이 결코 박사의 민족을 위한 생애중에 어느 일부분일망정 전체가 아닌 것이요, 또 외부적인 실정책임으로써 박사의 내면적인 애국정신을 말살하지는 못할 것이라 생각하며, 또 일찍이 말씀하신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귀국 제일성은 오늘날 오히려 이 나라 국민들에게 들려주시는 최후의 유언과 같이 받아들여져 민족사활의 잠언으로 삼으려는 것입니다.
 
 어쨌든 박사께서는 개인적으로나 민족적으로나 세기적 비극의 주인공이었던 것을 헤아리면 충심으로 뜨거운 눈물을 같이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마는 그보다는 조국헌정사상에 최후의 십자가를 지고가시는 '어린 양'의 존재가 되심으로써 개인적으로는 '한국의 위인'이란 거룩한 명예를 되살리시고 민족적으로는 다시 이 땅에 4·19나 5·16과 같은 역사적 고민이 나타나지 않도록 보살피시어 자주독립의 정신과 반공투쟁을 위한 선구자로서 길이 길잡이가 되어주시기 바라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사정으로 말미암아 박사로 하여금 그토록 오매불망하시던 고국 땅에서 임종하실 수 있는 최선의 기회를 드리지 못하고 이역의 쓸쓸한 해빈에서 고독하게 최후를 마치게 한 것을 가슴 아프게 생각하는 바입니다. (중략). 생전에 손수 창군하시고 또 그들로써 공산침략을 격파하여 세계에 이름을 날렸던 그 국군장병들의 영령과 함께 길이 이 나라의 호국신이 되셔서 민족의 다난한 앞길을 열어주시는 힘이 되실 것을 믿고 삼가 두손을 모아 명복을 비는 동시에 유가족 위에도 신의 가호가 같이 하시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1965년 5월말 미국 방문을 마칠 무렵 박정희는 김성은 국방장관을 불러 귓속말을 했다.
 
 '김장관은 공항에 도착하자 말자 정구영(당시 공화당 의장)씨를 만나 내가 그러더라고 하면서 '미국에 갔더니 존슨 대통령이 1개 전투사단을 파병해 달라는 간곡한 요청이 있어 수락했다'고 말하시오. 그리고 앞으로 국회심의를 거쳐야 하는데 잘 좀 처리해 주면 좋겠다고 부탁하고 오시오.'
 
 김장관은 귀국 직후 서대문에 있던 정의장 집으로 직행, 대통령의 말을 가감없이 전달했다. 그런데 정의장은 시큰둥하게 듣고 있더니 '월남가면 앞으로 전사자도 많이 나올 텐데, 그럴 경우 유가족들이 전사자 시체가 들어있는 관을 둘러매고 태평로 국회의사당 앞으로 몰려 나와 데모라도 벌이면 큰 일 아닌가'라며 걱정을 했다.
 
 '의장님. 현재 우리나라는 파병하지 않을 수 없는 입장입니다. 만약 미국 대통령이 요청하는 파병을 거절한다면 우리나라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 2개 사단을 다 뽑아 가든지 1개 사단이라도 뽑아 가 월남전선에 투입할 겁니다. 파병을 하지 않는다면 한미동맹관계도 금이 가기 쉽고 한국의 방위력도 그만큼 약화될 게 뻔합니다. 미군이 빠져 나가면 북괴가 무슨 짓을 할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월남 파병을 하는 것은 월남의 안보 때문이 아니라 한국의 안보 때문입니다. 안보를 담당한 국방장관의 입장에서는 불가피합니다. 의장께서 단안을 내려주시면 좋겠습니다.'
 
 정구영은 아무 대꾸도 없었다. 김장관은 그 길로 청와대로 들어 가 박대통령에게 '정의장께서는 별무 반응이시고, 유가족들이 데모라도 벌이면 큰일이라고 걱정하십디다'라고 보고했다.
 
 박정희는 벌컥 화를 내면서 '뭐? 데모를 하면 큰일 아니냐고? 그게 그렇게 두렵다면, 그게 무서워서 파병 못한다면 정권을 내 놔야지!'라고 소리쳤다.
 
 (조갑제출판국부국장기자) (이동욱월간조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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