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도 인파
애도 인파
1965년 7월20일 오후 정부는 국무회의에서 이승만 전 대통령의 장례를 국민장으로 결정했다. 이석제 총무처 장관이 장례준비소위원회 위원장이 되었다. 이장관이 박정희대통령에게 보고를 하니 박대통령은 '하여튼 정부로서 최선을 다해 도와주기 바라오'라며 간단하게 언급했다. 이 장관은 평소 박대통령의 이승만 전 대통령에 대한 배려가 각별하다고 느끼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오해를 하고 있는 것 중 하나가 당시 이박사의 귀국을 박대통령이 막은 것이 아니냐 하는 점인데, 그 당시 상황을 모르고 하는 말입니다. 이박사 말년에 벌어진 부정선거와 4·19 등 실정의 여파가 정부에 큰 짐이 되고 있었습니다. 언론들도 국장에 절대 반대 입장이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을 모셨던 장택상, 이범석, 변영태 전 총리 등과 임흥순 전 서울시장 등은 국장을 고집했고 4월 혁명동지회원들은 국장이든 국민장이든 사회장이든 결사 반대한다며 단식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대다수 언론들도 4월 혁명동지회와 비슷한 태도로 사설을 쓰곤 했다. 이석제 장관은 국장으로 할 경우 반대여론이 드셀 것을 고려해서 국민장으로 하되 격식은 국장으로 하는 것이 정부로서 최선을 다하는 길이라고 판단했다.
7월23일 오후 3시, 이승만의 유해를 실은 미공군수송기가 '고향생각'이 연주되는 가운데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하와이에서 과로로 입원, 서울로 오지 못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효상 국회의장, 조진만 대법원장, 정일권 국무총리 등 3부요인들을 데리고 공항으로 나가 5년1개월24일만에 돌아오는 건국 대통령의 유해를 맞았다.
윤치영(이승만 정부에서 내무부장관 역임)서울시장이 정일권 총리와 함께 비행기에 올라왔다. 윤시장은 국민장을 할 수밖에 없는 사정을 양자 이인수에게 설명하려 했다. 그런 윤시장이 매정하게 보이기만 했던 상주 이인수는 말을 하지 않은 채 유해를 따라 차에 올랐다.
영구차와 그 뒤를 따르는 세단의 행렬이 김포가도를 출발했다. 연도에는 많은 시민들이 나와 죽어서 돌아온 건국 대통령을 맞았다. 한국 부인회 소속 회원들이 검은 치마저고리를 입고 나와 꽃다발을 들고 이박사의 유해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차량 행렬은 속도를 줄이지 않고 그냥 지나쳤다. 윤치영 시장은 차안에서도 국민장을 수락하라고 이인수를 설득하다 이화장까지 따라 들어갔다. 문중 사람들은 상복을 갖춰 입고 길 가에 나와 서 있었고 4·19부상동지회원들은 '자유당 원흉들 사과하라. 이박사 유해 못 들어온다'는 플래카드를 들고 이화장 앞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이박사의 문중 사람들은 정부의 국민장 결정이 건국 대통령에 대한 홀대라고 생각했고, 4월혁명동지회 등은 국민장이 너무 과분한 조치라며 정부를 규탄하면서 사흘째 농성중이었다. 이날 밤 이승만의 양자 이인수는 '아버님은 자신의 사후 간소한 장례를 원하셨다'면서 정부가 결정한 국민장을 거부할 뜻을 비쳤다. 박대통령은 구자유당 인사들이 국민장에 불만을 품고 국장을 요구하고 있다는 보고를 듣고는 '정부가 국민장으로 양해했으면 고맙게 생각할 일이지 ··· 개인장으로 지내겠다면 내버려두라'고 역정을 냈다고 보도되었다. 이석제씨는 이를 부인했다.
'박대통령은 그런 말씀을 하실 분이 아닙니다. 언론들이 비판적으로 보도하려는 성향이 강해서 만들어진 말로 알고 있습니다. 유족들과 정부측 사이에는 사소한 장례 절차에 대한 논란이 더 많았습니다. 이 장례식은 철두철미 정부의 지도·배려하에 치러졌습니다.'
7월27일 아침 이승만 전 대통령의 유해는 이화장을 떠나 정동교회에서 장례식을 올렸다. 국립묘지로 운구될 때 수십만 시민들이 연도에 몰려나와 애도를 표했다. 대중의 반응은 언론의 비판적 논조와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이장관은 이날 아침 서울 시청 옥상에 올라가 사방을 둘러 보았다. 시선이 닿는 곳마다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이석제는 '이래가지고는 장례 행렬이 제대로 지나갈 수 있을까'하고 걱정했다. 정부가 동원한 인파도 아닌데 시민들은 한결같이 건국대통령에 대한 존경과 애도의 염을 품고서 거리로 모여나온 듯했다. 이석제씨는 6·25 당시 중대장으로 전선에서 죽을 고비를 숱하게 넘길 때가 떠올랐다고 한다.
'적군에게 포위되고 식량조달이 안돼 사기가 뚝 떨어져 있을 때에도 라디오를 통해 들려오는 '결사적으로 싸워 달라'는 이대통령의 육성 한 마디가 군인들에게 다시 일어나 싸울 수 있는 힘이 되었습니다. 이날 연도에 나온 일반 시민들도 이 분의 말년에 실정은 있었지만 이박사는 독립운동을 하시고, 해방 직후 좌익들이 사람들을 구름같이 끌어 모으며 혼란을 조성하고 있을 때 홀로 그 상황을 타개하고 자유 대한민국을 건국하신 분이란 점을 고맙게 여기는 진지한 표정이었습니다.' (조갑제출판국부국장기자) (이동욱월간조선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