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위 선양의 시대 개막
국위 선양의 시대 개막
박정희 대통령은 미국과 군부, 그리고 중산층의 강력한 지지하에 위수령 선포로써 한일협정 비준 반대 시위와 야당의 도전, 언론의 비판을 간단하게 제압할 수 있었다. 당시 정부와 군부는 뚜렷한 국가주의적 이념으로 무장되어 있었다. 논리로 무장된 물리력을 선전-선동-지식의 문화기능이 극복할 수는 없는 법이다. 박대통령은 학생시위가 잠잠해지자 위수령 선포 한 달만인 9월25일에 위수령을 해제했다.
정부는 1965년 9월에 들어서서 파월전투부대의 편성에 박차를 가했다. 1개 전투사단의 파견에 따른 군수지원부대 등의 편성으로 총파월 병력은 1만 7890명이 되었다. 수도사단(맹호부대·사단장 채명신 소장)이 9850명, 해병 1개여단(청룡부대·여단장 이봉출 준장)이 4218명, 보충병 268명, 군수지원사령부가 3554명. 수도사단은 3개 연대중 2개 연대만 파월부대에 포함시켰다.
군수지원사령부(사령관 이범준 준장)는 공병, 통신, 병참 등 7개 기술병과의 19개 부대를 경기도 양평군 용문 등지에 집결시키는 방법으로 10일만에 편성됐다. 1군 사령부는 용문과 강원도 홍천에 파월장병에 대한 보급물자를 분배하는 사무소를 두고 장비교환 및 정비를 실시했다. 파월부대는 9월4일부터 홍천(수도사단), 횡성(공병대대), 용문(군수사), 춘천(수송부대)에서 4주간의 교육 훈련에 들어갔다.
1965년 9월20일 박정희 대통령은 동해안 기지에서 파월전투부대의 제1일진으로 선정된 해병제2여단 결단식에 참석, 유시를 통해서 자유월남을 침략한 공산세력은 '월남의 적인 동시에 우리 한국의 적이며 또한 자유세계 공동의 적이다'고 말했다. 그는 또 '월남전선은 우리의 휴전선과 직결되어 있다'고 지적했다.
'이웃집에 불이 난 것을 보고도 가만히 앉아 구경만 하다가는 그 불이 내집에까지 번져 집을 태워버리는 것과 꼭 같이 지금 월남을 돕지 않는다면 우리나라에게도 직접적인 위협이 될 것입니다.'
10월4일 맹호부대 훈련장에서는 사고가 있었다. 훈련병이 수류탄을 던진다는 것이 발 밑에 떨어뜨렸다. 중대장 강재구 대위는 수류탄을 몸으로 덮쳐 터진 파편을 대신 받아내면서 부하들을 살리고 산화했다. 10월9일 청룡부대는 월남 동북해안 캄란항에 상륙, 신상철 주월대사의 환영을 받았다.
10월12일엔 맹호부대 환송식이 30만 인파가 모인 여의도 광장에서 있었다. 박대통령은 유시에서 '과거 남의 도움만 받아왔던 우리의 역사는 남에게 도움을 주는 새 시대에로 전환되었다'고 선언했다.
'후세에 너의 조상이 누구냐고 묻거든 나의 조상은 트로이 전선에 참전한 용사였다고 일러주라고 하던 고대 희랍사람들의 긍지를 맹호부대 장병 여러분들도 가져주기 바랍니다.'
한일국교정상화를 둘러싼 갈등 같은 것은 월남파병에선 나타나지 않았다. '겨레의 정성 모아 맹호용사 환송하자'는 표어대로 여야, 남여노소, 지역의 차이를 넘은 국민적 성원이 동지나해, 남지나해를 건너는 장병들을 따랐다. 박정권에 비판적이던 신문들도 '떠나는 마음' '보내는 마음' '베트남 통신란 (파월장병들과 가족 친지들 사이의 교신란)' 등의 기획기사를 통해서 모처럼 군민일체의 단결심을 고취했다.
'6·25동란 때 괴뢰군으로부터 받은 쓰라린 상처는 아직 아물지 않았습니다. 북괴를 때려눕히는 심정으로, 민족의 원수를 갚는다는 매서운 마음으로 공산게릴라들을 두드려 잡으렵니다.'(맹호부대 1연대 이길영 준위)
'2년6개월 사병생활의 마지막을 월남 베트콩 소탕전에서 장식하고 싶습니다. 자유우방을 돕고 한국의 국위를 선양하면서 또 외국구경을 해본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입니다. 아버지, 어머니, 친우들 안심하십시오.'(김덕영 병장)
'날품팔이하는 사람이다. 나이를 먹어 월남에 가지 못하는 게 한이다. 동란중에 단 하나뿐인 혈육을 잃었다. 멀리 월남까지 공산당을 잡으러 간다니 마음 같아서는 여러분의 무기와 짐을 내 지게로 날라다주고싶다.' (심수동·자유노동자)
'5000년 우리 역사상 첫 해외파병으로서 국위선양에 가장 좋은 기회라고 생각한다. 본국의 가족은 우리 경찰이 보호, 원호할 것이다. 염려말고 용전해주기 바란다.'(이순구·서울중부경찰서장)
'일찌기 6·25사변 때에 우리 민족이 경험한 바와 같이 그곳에도 후방에 있는 주민들은 말할 수 없는 고초를 겪을 줄로 안다. 이들 피난민, 특히 부녀자 고아들 병자들에 대하여 참된 인류애와 친절로써 한국국민의 인정과 사랑을 나타낼 수 있기를 바란다.'(한경직·서울 영락교회 목사)
'동기생들, 좀더 시야를 넓혀보자는 것이 이번 자원의 의도였네. 지금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월남은 새로운 역사창조의 길로 줄달음치고 있네. 나는 그 줄달음속에 대한민국의 한 해병으로서 참여하여 역사의 밑거름이 되려는 것이네.'(청룡부대 1대대 중화기 중대 양만숙 중사)
10월10일자 조선일보는 사이공발기사에서 '사이공엔 한국인 여행자가 많다. 신문기자, 정부관계 공무원도 많지만 실업인들의 수도 만만치 않다. 수출을 얼마나 증가시킬 수 있는가, 우리나라가 얼마나 돈벌이를 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엿보기 위한 것이다'라고 보도하고 있었다.
우리 젊은 여공들이 봉제공장, 가발공장, 홀치기 공장 등의 수출전선에서 세계시장을 겨냥한 땀흘림으로써 새 역사 창조의 전면에 나타난 데 이어 젊은 남성들도 월남전선으로 뛰어들어감으로써 세계사의 중심무대에 등장하게 되었다. '국위 선양'이란 월남파병 이후의 유행어는 한반도를 떠나 세계를 무대로 뛰기 시작한 한국남성들의 야성을 상징하는 말이 되었다. (조갑제출판국부국장기자) (이동욱월간조선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