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조선  |  조선일보  |  독립신문  |  미래한국  |  올인코리아  |  코나스넷  |  라이트뉴스  |  리버티헤럴드  |  뉴데일리  |  뉴스파인더
    
   


기사 확대  기사 축소  

월남특수
 월남특수
 
 월남특수
 
 훗날 윌리엄 포터 주한미국 대사는 이렇게 말했다.
 
 '한국인들은 그들이 월남전에 대규모 병력을 보냈으므로 그 전쟁으로 조성된 시장도 공유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즉, 그들은 전쟁의 위험뿐 아니라 전쟁이 가져다준 기회에도 참여하고 싶어했다.'
 
 월남전은 엄청난 인명피해와 함께 거대한 시장을 만들어냈다. 미국의 전쟁예산은 1966년 회계연도엔 61억 달러, 67년 205억 달러, 68년 250억 달러, 69년엔 262억 달러로 늘어나고 있었다. 이에 따라 주변국들도 월남전 특수를 경험하게 되었다. 1966년의 경우 한국의 특수규모는 일본외무성 조사에 따르면 7300만 달러였다. 다음해에는 한국이 월남전으로 약 2억 달러를 벌어들여(총국민소득의 3.1%) 월남에 인접한 태국의 2억6000만 달러에 이어 두번째로 많은 돈벌이를 하고 있었다.
 
 한국경제인연합회가 집계한 1967년 한국의 월남특수 규모를 보면 총액은 1억3220만 달러였다. 그 가운데 미군 등에 대한 용역 군납에서 3268만 달러, 근로자 임금이 3250만 달러, 파월군인들의 봉급이 3000만 달러로 대종을 이루었다. 용역군납의 종류는 다양했다.
 
 연예, 세탁, 의무보급관리, 침구수리, 사진-초상화, 하역, 운수, 여행알선, 선박대여, 시계 및 카메라 수리 등등. 67년에 월남에서 가장 많은 돈을 번 회사는 하역-운수 분야에 진출한 한진상사였다. 한진의 이해 용역실적은 2500만 달러로서 다른 모든 회사들의 용역을 합쳐놓은 것보다도 많았다. 조중훈-조중건형제가 이끌던 한진은 월남에서 돈을 벌어 대한항공을 인수하게 된다.
 
 한진처럼 화려한 기록은 남기지 못하고 있었지만 월남에서 조용히 저력을 기르고 있었던 것이 현대건설이었다. 지금은 세계적인 기업이 되었지만 당시 현대건설은 세탁업과 준설공사로써 돈을 벌었다. K.B.킴이라는 한국여인이 월남에서 미군을 상대로 세탁소를 운영하고 있었다. 현대는 이 여인과 합작형태로 월남에 진출했다가 자본을 인수하여 단독운영에 들어갔다. 나트랑, 퀴논, 캄란에 7개의 세탁소를 만들어 1968년에서 72년까지 170만 달러를 벌었다. 비록 규모는 작았지만 이율이 높아 본사의 중요한 수입원이었다고 한다.
 
 현대건설은 1966년 2월에는 일본에서 준설선을 한 대 사들이고 부산과 인천에서 기능공들을 모집, 캄란항 미군기지 건설의 준설공사에 투입했다. 외국회사들이 맡고도 완공하지 못한 위험한 지역을 맡아 공기 이전에 끝냄으로써 미군측의 신뢰를 얻은 현대는 메콩강 오지의 빈롱항 준설공사, 미토항과 붕타우 항만 준설공사도 따냈다. 현대는 노동자들에게 초과작업량에 대해선 급여액의 100%를 상여금으로 주는 방식으로 공사를 강행하였다.
 
 경험이 거의 없는 인력이었지만 공사를 하면서 원리를 배우는 방식으로 밀어붙였다. 현대는 캄란 소도시 건설공사, 반호이 부두공사도 맡아 1966년부터 70년 사이에 건설부문에서 1783만 달러의 수입을 올렸다. 현대는 같은 시기에 태국에서 파타니 나라티왓 고속도로 공사를 했으나 큰 손해를 보았다. 우리나라 해외건설 역사의 첫 장을 연 이 공사는 2차선 98㎞에 공기 30개월, 공사비는 522만 달러였다. 1965년말 현대의 공사팀이 김포공항에서 출국할 때는 KBS에서 중계방송을 할 정도였다.
 
 현대는 이 공사로 2억8800만원의 손해를 보았다. 강우량이 많고 토질은 나빴다. 주먹구구식의 공법에 의한 적당주의식 공사는 외국인들에게는 먹혀들지 않았다. 개혁적인 신진기술자들과 수구적인 기성기술자들 사이의 갈등은 파업으로 발전하기도 했다. 이 실패의 교훈은 그 뒤 경부고속도록 건설과 중동건설시장 진출 때 활용되었다. 현대건설 방콕지점장 정세영을 비롯한 주재중역 김영주 권기태 경리직원 이명박 등 그 뒤의 현대건설을 이끌고 나갈 인재들도 이 실패의 현장에서 단련되었다.
 
 이명박은 고려대 총학생회장 직무대행으로서 1964년의 한일회담반대 데모에 참여했다가 구속되어 넉 달동안 감방살이를 했다. 그는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고 풀려나 졸업한 뒤 1965년 5월 현대건설의 해외파견 직원 채용시험에 응시했다. 1차 필기시험에 합격했으나 시위 전력에 걸렸다. 이명박은 박정희 대통령 앞으로 편지를 썼다. 며칠 뒤 민정담당 이낙선 비서관이 이명박을 불렀다.
 
 '국가체제에 도전했던 자들에게 불이익을 주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학생들에 대한 경종의 의미도 있고.'
 
 '한 개인이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길을 국가가 가로막는다면 국가는 그 개인에게 영원한 빚을 지는 것입니다.'
 
 이낙선은 이명박의 이 말이 마음에 걸렸다고 한다. 그는 이명박건을 비서관 회의에 올려 입사를 허가해 주도록 했다고 한다. 면접시험 때 정주영 사장이 이명박에게 물었다.
 
 '건설이 뭐라고 생각하나.' '창조라고 생각합니다.' '왜?' '무에서 유를 창조하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 말은 잘하는구먼.'
 
 정주영은 미소를 짓더니 옆에 앉은 임원들을 향해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요즘은 말만 번지르르한 건달들이 많아.'
 
 이즈음 신문의 요인 프로필난에 자주 등장하는 용어가 있었다. '과묵한 실천력'. 이는, 묵묵히 일제강점기와 전란의 시대를 헤쳐온 박정희, 정주영 같은 기성세대가 민족의 활동공간을 해외로 넓히면서 이명박 같은 신진세대들을 근대화의 현장에 끌어들이기 시작한 시대의 덕목이었다.
 
 (조갑제출판국부국장기자) (이동욱월간조선기자)
 
기사목록  프린트하기 

조선일보 | 스포츠조선 | 주간조선 | 소년조선 | 여성조선 | NK조선 | IT조선 | 잡지DB

서울특별시 종로구 신문로1가 163 광화문 오피시아 1729호  |  대표자 : 조갑제  |  사업자등록번호 : 101-09-63091
상호 : 조갑제닷컴  |  개인정보관리 책임자 : 김동현  |  전화번호 : 02-722-9411~3  |  팩시밀리 : 02-722-9414 |
    개인정보취급방침

발행인 : 조갑제 | 편집인 : 조갑제 | 등록번호 : 서울아00945 | 등록일 : 2009/08/24 | 국민은행 360101-04-065553(예금주: 조갑제닷컴)
webmaster@chogabj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