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남성의 자신감 회복
한국 남성의 자신감 회복
박정희 정부는 월남에 한국군을 파견하여 피를 흘리는 대가를 미국측으로부터 아주 비싸게 받아냈다. 1966년 초 미국이 1개 전투사단의 추가파병을 요청하는 것을 계기로 하여 우리가 끌어낸 미국측의 각종 지원은 이른바 '브라운(주한미국대사) 각서'에 구체적으로 규정되었다. 이 각서에 따라 미국은 월남파병에 따른 장비와 각종 경비를 한국군에 제공하고 파월장병들의 급여도 지불하며 주월 한국군이 구매하는 물건은 최대한 국내에서 조달해야 했다.
주월미군과 월남군이 구매하는 물건 가운데서 일정 품목은 한국에서 발주한다, 월남에서 활동하는 미국회사에 한국인들의 취업을 적극적으로 보장하며 미국 국제개발처(AID)가 월남에서 실시하는 농촌건설 등의 사업에 필요한 물품을 한국에서 많이 구매한다, 한국의 수출진흥을 위한 기술원조를 강화한다, 맹호부대 파견을 전제로 미국측이 약속했던 1억5000만 달러 차관 외에 같은 성격의 AID차관을 추가적으로 제공한다 등등.
한편 한국군에 대한 미국의 원조도 월남전 기간에 급증했다. 1964년에 1억2200만 달러, 65년에 1억1250만 달러이던 것이 66년엔 2억2810만 달러, 67년엔 4억3220만 달러, 68년엔 6억5630만 달러, 69년엔 4억1890만 달러, 70년엔 3억7150만 달러, 71년엔 5억9790만 달러, 72년엔 4억5400만 달러에 달했다. 66∼72년 사이 한국군은 총31억5800만 달러의 군사원조를 받은 것이다. 이는 월남파병의 조건으로 우리 정부가 요구했던 국군 현대화 사업에 대한 원조가 늘어나는 등 한미간의 군사협조가 원활해졌기 때문이다.
1964년부터 1972년까지 월남전선에 투입되었던 한국군의 총병력은 연인원으로 31만7000여 명. 전사자가 3806명이고 비전투중 사망자는 1154명으로 합계 4960명. 부상자는 1만1062명(전투중 8480명, 비전투중 2582명)이었다. 총사상자는 1만6022명.
우리 정부가 월남전으로 얻은 막대한 경제적 이득은 이들 사상자의 피로 얻은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국제관계에서 타국을 돕기 위해 흘린 젊은이들의 피값은 가장 비싸게 계산된다는 교훈을 여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한국전에서 미군이 흘린 피값은 지금껏 우리가 물고 있다. 그것은 미군에게 국군의 작전지휘권을 양도한 것 등 외교와 안보정책에 있어서의 대미 종속성, 그리고 국내 시장의 대미 개방 같은 것들이다. 군인들의 피는 절대로 공짜가 아닌 것이다.
월남전으로 마련된 거대한 시장에 진출한 한국인들과 기업은 국제무대에서 경쟁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확인했다. 실전경험에서 우러나온 이런 자신감을 도약의 발판으로 삼아 1970년대에 한국인들은 중동 건설시장 등 세계로 뻗어나가 민족의 활동공간을 넓힐 수 있었던 것이다.
오원철(상공부 차관보 및 청와대 제2경제수석 역임)은 '한국 남성들은 월남에서 미국인들과 함께 일하고 싸워보면서 처음으로 자신들의 잠재력을 실감할 수 있었다'고 지적했다. 월남체험이야말로 한국남성들에겐 최초의 집단적인 국제화 경험이었던 셈이다.
1965년 가을 한일조약의 국회비준과 월남파병안을 처리하여 여유를 갖게 된 박대통령은 모처럼 청와대 출입기자들을 정원으로 불러 간단한 다과회를 가졌다. 한 기자가 '새로 만든 각하의 상황실을 구경시켜주실 수 없습니까'라고 물었다. 대통령은 말이 없었다. 다른 기자가 '그곳에는 전국 공무원들의 신상자료가 다 들어 있다는데…'라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자 박대통령은 '그럼 보여주지'라고 말하더니 앞장을 섰다. 본관 집무실 동쪽에 마련된 10평 남짓한 방으로 들어간 기자들은 의외의 광경에 놀랐다.
삼엄하고 화려할 줄 알았던 상황실 벽을 벽지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뒤덮고 있는 것은 통계수치와 도표, 그림이 많은 각종 상황표였다. '조세징수사항' '무역동향' '산업시설 건설현황' 등등. 기자들의 눈을 특히 강하게 끈 것은 한국 지도 위에 그려진 수많은 공장들의 굴뚝 표시였다. 준공된 공장, 건설중인 공장, 공장 건설예정지 등등.
박대통령은 지시봉을 들더니 기자들에게 각종 경제통계를 설명해갔다. 괘도를 척척 넘기면서, 그러나 보지도 않고 숫자를 거의 외우면서 설명하는데 착오가 없었다. 박대통령은 '이런 식으로 나가면 우리도 70년도에는 자립경제를 달성할 수 있을 거야'라고 했다. 그가 말한 자립경제란 미국 원조를 받지 않는 경제를 뜻했다.
부산일보 김종신 기자가 '각하 방에는 온통 경제문제밖에 없군요'라고 말하자 대통령은 싱긋 웃더니 '배가 불러야 불평이 없는 거야'라고 했다. 그는 이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신문기자들도 정부를 무조건 헐뜯으려고만 하지 말고 정부가 하는 일에 협조를 좀 해주시오. 그렇다고 잘못한 일을 잘했다고 써달라는 건 아닙니다. 올바른 관찰과 판단 아래 잘하는 것은 잘한다고 해주어야지 열심히 하는데 헐뜯기만 하면 의욕이 저하되는 거요.'
박대통령은 경호실 옆에 신관을 짓겠다면서 '아침에 2층에서 1층으로 내려와 집무를 보고 2층으로 퇴근하니 다람쥐가 쳇바퀴 돌듯해서 소화가 되지 않을 지경'이라고 했다. 신관을 지으면 집무실을 거기로 옮기고 싶다고 했다. 새 집이 마련되면 기자들에게도 큼직한 방을 하나 내주겠다고 약속했다. 이 약속은 지켜졌으나 2층 내실과 1층 집무실 사이를 출퇴근하는 일은 10·16사건 날까지 계속되었다. 박대통령은 새 집무실을 가진다는 것에 대하여 마음에 큰 부담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조갑제출판국부국장기자) (이동욱월간조선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