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사를 할 줄 아는 연구원 지향
장사를 할 줄 아는 연구원 지향
초대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 소장 최형섭 박사가 연구소의 기틀을 잡는데 성공한 것은, 박정희 대통령의 전폭적인 엄호를 확보한 데다 연구소의 목적을 국가이익과 일치시키고 연구성과를 기업에 팔도록 함으로써 연구분위기에 경쟁논리를 도입했기 때문이다.
이런 장치가 없이 연구자들을 모으면 기초연구부터 하자느니 사회가 원하는 주제가 아니라 자신이 좋아하는 주제만 선택하자느니 해서 국가발전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그야말로 연구를 위한 연구만을 할 가능성이 높다. 최소장은 연구소의 개념을 정할 때부터 선진국에서나 가능한 한가하고 이상적인 모델을 버리고 우리의 실정과 시대정신에 맞는 한국형 연구소를 만들려고 했다. KIST는 정부 돈은 받아쓰되 자율적으로 운영하는 캐나다의 NRC 연구소, 자기 나라에 필요한 연구를 중점적으로 수행하는 호주의 CSIRO, 연구결과를 기업화하는 일본의 이화학연구소, 그리고 미국 바텔 연구소의 계약연구방식 등의 장점만을 따와서 만든 것이었다.
선진국의 제도나 노하우를 배우되 그것을 모방하지도 숭배하지도 않고 조국이 처한 실정과 국가목표에 맞게 소화-변형시킴으로써 한국식으로 재탄생시키는 방식, 이것이 바로 박정희식 주체성의 핵심이었다. 박정희의 근대화방식은 항상 시장논리와 경쟁논리를 깔고 있었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자본주의적이지만 강력한 국가개입의 계획경제였다는 점에선 사회주의적이며 충효를 덕목으로 하는 인간관에 기초한 점에선 유교적이다.
그는 또 한국적인 전통과 문화적 토양에다가 미국적인 과학-기술, 일본적인 국가주의 정신, 중국적인 인문교양을 접합시키는 방식으로 근대화의 전략과 철학을 만들었다. 조국의 현실과 필요성을 항상 사고의 중심에 놓는 이런 방식은 그 목표와 가치관을 대다수 국민들(일부 지식인이 아닌)의 안정-복지-자유의 증진에 두었기 때문에 일관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최형섭(현재 80세)이 박정희에 의해 중용된 것도(그는 박대통령 아래서 13년간 KIST 소장, 과기처 장관, 경제과학심의회 위원으로 일했다) 일하고 생각하는 방식이 박대통령과 맞았기 때문이다.
최소장은 해외에서 일하는 한국연구원들을 유치하기 위해 연구소 안내 책자를 만들어 돌렸다. 연구원 모집 신청서를 낸 사람중에 78명을 뽑아 면담하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갔다. 최소장은 미국 바텔연구소에서 세 사람을 지원받아 신청자 한 명당 세 차례씩 인터뷰를 했다. 한번은 자신이 가르쳤던 제자가 '절 그렇게 못 믿겠습니까'하고 불평을 하더라고 한다.
'지금 한국에서는 자기가 좋아하는 연구를 했다가는 곤란하다는 점을 알아야 해. 기업에 공헌이 되는 연구를 해야 하는데 그런 연구는 재미가 없을 수도 있단 말이야. 그러니 잘못 알고 가서 나중에 후회하면 어떻게 되겠어.'
박사학위를 따고 5년 이상의 연구경력을 가진 18명을 선발한 최형섭은 이들을 미국의 바텔기념연구소로 보냈다. 벨 연구소 출신의 한 사람이 말했다.
'하필이면 왜 벨 연구소보다 못한 바텔로 보냅니까?' '여러분들을 바텔로 보내는 것은 전문분야 지식을 보강하려는 것이 아니고 어떻게 장사를 할 것인가를 배우기 위한 것입니다. 우선 어떻게 연구계획서를 써서 기업에서 연구프로젝트를 따오느냐를 배워야 합니다.'
최형섭과 KIST의 성공은 과학기술을 돈벌이와 직결시킨 점에서 출발한 것이다. 돈벌이를 죄악시하여 사농공상, 즉 장사하는 사람을 경멸하는 가치관과 신분질서를 만들었던 조선조적인 의식구조가 아직도 살아움직이는 한국사회에서는 최형섭식이나 박정희식의 실용노선은 기득권층인 지식인들 (조선조의 사에 대응한다)의 민주주의를 앞세운 거센 반발을 부르게 되어 있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학구적인 것이 아니라 기업이 원하고 기업이 필요로 하는 것이라야 했다. 그러기에 연구하는 사람들도 이에 맞는 일을 해야 했다. 그렇지만 현실은 이와 다르다. 공부한 사람들, 특히 외국에서 학위를 딴 사람들은 역시 학구적인 것을 좋아한다. 이러한 사회의 요구와 연구원의 대응을 현실에 맞게 조화시키는 일이 연구소 경영진이 고려해야 할 당면과제였다.>(최형섭 회고록 '불이 꺼지지 않는 연구소'에서 인용)
당시 우리 기업의 요구도 학구적인 연구보다는 현장기술 지도인 경우가 많았다. 1960년대 중반 도약기에 들어선 한국경제, 특히 수출드라이브를 선도하고 있던 섬유공업체에서 원하는 것은 새로운 섬유의 합성이 아니라 직물가공에 있어서의 염색문제였다. 이런 연구는 외국에서 공부하고 온 연구원들에게 하라고 해도 하지 않는다. 최소장은 이 분야의 연구원을 현장에서 찾아내려고 했다. 서울공대 섬유과를 졸업하고 부산에 있던 대원염료회사란 중소기업에서 일한 적이 있던 윤한식 박사를 연구원으로 데려왔다. 기술자 출신 연구원인 윤씨는 학자 같은 연구원들 사이에서 마음고생도 많이 했지만 결국 대성했다. 그는 나중에 제3세대 합성섬유인 아라미드 섬유의 제조방법을 개발했고 그가 제시한 고분자형태학의 새 이론은 세계적인 권위를 가진 학술잡지 네이처(Nature)지에 소개되었다.
최형섭은 기업체를 돌아다니면서 연구프로젝트를 따올 일종의 영업담당자로 서울시 수도국장이던 최종완 박사를 KIST 연구개발실장으로 데리고 왔다. 과학도 알고 장사에도 수완이 있는 그는 슬라이드와 책자를 만들어 백방으로 연구사업을 팔러 다녔다.
(조갑제출판국부국장기자) (이동욱월간조선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