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크노크라트형 대통령
테크노크라트형 대통령
박정희 대통령이 추진한 근대화 혁명의 정신은 실용주의, 합리주의였다. 이는 과학정신과도 통하는 말이다. 박대통령은 과학자는 아니었지만 과학과 기술을 이해하는 지도자였다. 박정희는 만주국, 일본, 한국의 육사를 두루 거쳤는데 육사교육은 그 성격이 이공계에 가깝다. 박정희는 또 보병에서 포병으로 전과하여 포병술을 익혔다. 포병 장교는 전투를 시스템적으로 바라보게끔 훈련을 받는다. 포병은 대포와 포탄의 성능을 잘 알아야 하고 목표를 명중시키려면 독도법과 측량법, 삼각법에 숙달해야 한다.
박대통령은 헬리콥터를 타고 출장을 갈 때 동승한 장관이 지도를 보고 있으면 '지금 어느 지점에 와 있는지 아느냐'고 묻기도 했다. 장관이 모른다고 하면 지도를 손으로 짚어가면서 정확한 위치를 알려주었다. 헬기에서 현재의 비행위치를 지도상에서 알아맞히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박대통령은 헬기를 타고 다니면서 직접 경부고속도로의 노선을 긋기도 했다. 박대통령은 정치인이나 행정가는 거짓말을 할 수 있지만 기술자들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그들의 의견을 존중했다.
1962년 군정시절 상공부 화학과장이던 오원철은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의 호출을 받았다. 텅빈 의장실에서 홀로 담배를 피우고 있던 박의장은 이렇게 물었다.
'지금 말이야, 제3시멘트 공장과 제4시멘트 공장이 이웃한 거리에서 짓고 있는데 서로 마찰이 심해. 선발업체인 제4시멘트 공장에서는 용수가 부족하다고 제3공장을 옮겨달라고 진정서를 보내오고 있는데 오과장 생각은 어떤가.'
'심한 갈수기가 아니라면 시멘트 생산에는 물이 그다지 많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문제가 있다고 해도 각자가 따로 저수지를 만들면 별 지장이 없을 겁니다. 정부가 간여할 정도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래? 알았어.'
서울대 화공과 출신의 엔지니어인 오원철은 1967∼71년 사이의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핵심으로 석유화학공업건설을 넣어야겠다고 판단하여 보고서를 만들어 1965년 상공부 연두순시 때를 기다렸다. 오원철은 난해한 기술용어가 많은 보고를 하는 동안 경청하는 대통령을 보고는 용기를 얻었다. 그는 남북한 비교 항목에서 특히 힘을 주었다.
'북한에서는 비료, 비날론 섬유 등 모든 화학 및 섬유제품을 석탄을 원료로 해서 생산하고 있습니다. 전기를 많이 쓰고 생산비가 많이 들어서 다른 나라에서는 이미 폐기한 공법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석유화학공업이 완성되면 경공업분야에서는 남한이 단연 우위에 설 수 있습니다.'
이 말에 기분이 좋아진 박대통령은 즉석에서 '석유화학공업기획단'을 구성해서 준비작업을 진행하도록 지시했다. 그 뒤 울산석유화학단지 준공식 때 박대통령은 열차편으로 내려가면서 동승한 장관들에게 '석유화학에서 나오는 제품명을 말해보라'고 했다. 장관들은 2∼3개밖에 대답하지 못했다. 엉터리 답을 하면 대통령이 일일이 고쳐주기도 했다.
박대통령은 공장이나 토목건설현장, 또는 무기개발현장에 직접 나가 기술자들과 일문일답을 벌이고 토론도 하면서 과학기술 지식을 넓혀나갔다. 기술자들은 대체로 소신이 강하기 때문에 대통령 앞에서 서로 설전을 벌이고 대통령한테도 반박을 서슴지 않았다. 박대통령은 이런 것에 구애받지 않고 끝까지 들어주는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올해 인구가 30여만명인 박정희의 고향 구미시의 수출액은 약 120억 달러로 예상되고 있다. 이는 북한전체 수출액의 약 8배이다. 물론 구미 전자공업단지의 덕분이다. 오늘날 한국을 먹여살리고 있는 전자-통신 산업의 발전에 있어서 전환점이 되었던 것은 1969년 여름에 있었던 상공부의 전자공업 육성방안 보고였다. 오원철 상공부 기획관리실장이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그는 '금년부터 1971년까지 62개 품목을 집중개발하여 1억 달러어치를 수출하고 1976년까지는 4억달러어치를 수출하도록 하겠다'고 했다. 오원철 실장의 보고는 약 2시간 동안 계속되었다. 오원철 실장은 과학기술적인 사업계획을 실현성 있어보이게, 그리고 아주 쉽게 설명하는 요령을 가진 사람이었다. 오실장은 정부가 전자산업을 중점적으로 육성하기 위해서는 140억원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제조업 지원금으로 124억원, 연구 및 진흥기관에 16억원.
박대통령은 장대한 그림이 그려지는 거창한 보고를 숨죽이며 다 듣고 난 뒤 배석한 김학렬 경제기획원 장관에게 말했다.
'김부총리, 낼 수 있소?' '예, 상공부 안대로 하겠습니다.' '그럼 상공부 안대로 조치하시오.'
박대통령은 결단을 내린 뒤에도 자리를 뜨지 않고 담배를 한 대 피우고 있었다. 분위기가 부드러워졌다. 오원철은 개발코자 하는 부품의 현물을 큰 베니아판에 매달아놓고 이름을 붙여놓았었다.
박대통령은 김부총리에게 말했다.
'전에 임자가 청와대 경제수석비서관일 때 콘덴서가 무엇인지 물었더니 모른다고 하더구만. 저기 베니아판에 축전기라고 써놓은 것이 바로 콘덴서야.'
1976년의 전자제품 수출액은 당초 목표(4억 달러)를 초과한 10억3600만 달러로서 전체 수출액의 17.6%에 달했다. 오원철은 박대통령이 '비단 공업분야뿐만 아니라 농업, 군사, 각종 연구소, 사회간접시설 등 국정전반에 걸쳐 현장과 기술자들한테서 배우는 태도를 견지했기 때문에 나중에는 각종 기술적 사안에 대해서 자신있게 판단을 내릴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완벽한 테크노크라트였다'고 평했다.
(조갑제출판국부국장기자) (이동욱월간조선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