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인체제에 포위된 김종필
4인 체제에 포위된 김종필
1965년 12월20일 섬진강 댐 준공식에 참석하러 가는 박정희 대통령의 자동차 안에서 정구영 의원의 고언은 계속되었다.
'각하의 명령을 어겼다고 해서 신문에서는 항명이라 하고 주동자를 제명해야 한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각하의 명령이 곧 당명이란 논리가 성립되는데… 반드시 제명해야 한다는 말씀은 거두시지요. 정권 정도로 처리해도 각하의 위신은 충분히 유지됩니다.'
박대통령은 좀 심한 말을 했다싶었는지 '선생님 마음도 이해합니다'라고 했다. 12월24일 공화당은 국회의장 선출 항명사건의 주동자인 김용태, 민관식 두 의원에게 6개월간의 정권, 김종갑, 신형식 의원에겐 경고처분을 내렸다. 박대통령은 정구영뿐 아니라 김종필 등 여러 사람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비교적 가벼운 처벌로 마무리했다.
이날 밤 박대통령은 당의장 복귀가 결정된 김종필 의원의 집을 찾았다. 정권처분을 받은 김용태를 비롯, 예춘호 정태성 신윤창 오학진 등 김종필 직계 의원들과 조시형 당기위원장을 불러 새벽까지 술을 마셨다. 박대통령은 공화당 창당무렵의 어려웠던 이야기를 꺼낸 뒤 '그래도 공화당이 이 정도로 큰 데는 김용태 의원의 고집 덕분이었다'고 위로했다. 며칠동안 초조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있던 김용태는 사면된 수인처럼 기뻐하면서 '앞으로 6개월 동안 백의종군하겠습니다'라고 감격했다고 한다.
12월27일 공화당은 서울시민회관에서 전당대회를 열고 박정희 대통령을 다시 총재로 선출하고 총재가 당의장으로 지명한 김종필에 대해 동의절차를 밟았다. 1964년 6·3계엄령 사태 직후에 당의장에서 물러나 여섯 달 동안 외유하고 돌아와 조용히 지내던 김종필은 이로써 박-김 체제로 불리던 권력의 핵심으로 복귀한 듯 보였다. 그는 취임인사말을 통해 '신념에 따라 어려움을 뚫고 나가는 것이 주체성이며 자주성이다'고 말하고 '알찬 조국을 이룩하여 그 힘으로 국토를 통일하는 것이 우리의 최종목표이다'고 강조했다.
김의장은 30일 기자회견에서 중요한 언급을 했다. 한 기자가 월남에 한국군을 증파할 가능성에 대해서 묻자 그는 '월남파병과 한일국교정상화는 우리의 발판을 밖으로 내디딘 역사적 대업이었다. 만일 증파요청이 있으면 우리의 정황에 따라 고려될 수도 있는 문제가 아닌가 생각한다'고 말했다.
1966년 1월1일 휴버트 험프리 미국 부통령이 마르코스 필리핀 대통령의 취임식에 참석한 뒤 한국에 들러 박대통령과 이례적인 신정회담을 가졌다. 험프리 부통령은 '월남전에서 이기려면 미군 50만 명의 투입이 필요하다고 판단된다. 한국도 이에 비례하여 1개 전투사단을 추가적으로 파견해 주기 바란다'는 존슨 대통령의 뜻을 전달했다. 1월3일 박정희 대통령의 뜻에 따라 공화당은 당내 요직을 새로 짰다. 정책위 의장에 백남억, 재정위원장에 김성곤, 사무총장에 길재호, 선거대책위원장에 박준규. 당을 실질적으로 이끌어갈 13명의 당무위원으로는 당연직 7명(김종필 당의장, 김성진 중앙위 의장, 백남억, 길재호, 김동환 원내총무, 장경순 국회부의장, 원용석 무임소장관)에 김성곤, 김유택, 김진만, 정태성, 김택수, 최정기 등 여섯명이 임명되었다.
이들 가운데 친김종필로 분류될 수 있는 이는 정태성, 김택수, 김동환 정도에 불과했다. 박정희 총재와 직접 연결되어 공화당을 이끌어 가게 되는 김성곤-김진만-길재호-백남억의 이른바 4인 체제가 전면에 포진한 것도 이때가 처음이었다.
김종필은 당의장에 복귀하긴 했으나 4인체제에 실권을 넘겨주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박정희는 공화당 4인체제와 김형욱의 중앙정보부, 그리고 이들을 조정하는 참모장으로서의 이후락을 삼각점으로 하여 권력을 관리하게 된다. 구정치인과 5·16군사혁명 주체세력의 혼성체인 박정희 친위세력은 반김종필의 색깔을 내게 된다.
대통령 친위세력과 김종필의 결정적인 차이점은 전자가 박정희의 수족으로 기능한 데 반해 김종필은 박정희의 잠재적 대체세력으로 비쳐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박정희로서는 정권강화와 연장을 위해서는 친위세력의 김종필 견제를 묵인, 또는 지원하지 않을 수 없는 숙명적 관계를 만들게 된 것이다.
5·16 혁명 직후 약 5년간 박정희는 권력의 창출과 유지를 위해서 김종필의 도움을 필요로 했으나 친위세력의 강화 이후엔 박-김 체제가 기본적으로 라이벌 관계란 특성을 띠게 되었다. 김종필에겐 의외의 변신이 길재호였다. 육사 8기 동기생인 길재호는 가장 열렬한 김종필계였으나 반김의 핵으로 돌변한 것이다. 김종필은 이렇게 회고했다.
'다른 사람들이 길재호를 설득한 면도 있지만 결국은 대통령의 뜻이었다고 봐야지요. 어떻든 하나의 새로운 핵을 만드는 데 길재호가 참가했는데 왜 박대통령께서 그 핵을 측근에 두기로 했는지는 그 어른한테 내가 돌아가시기 전에 물어보지 않았으니 알 수가 없지요. 구정치인들은 이야기 상대가 되고, 호락호락 잘 움직이고 경험도 있고, 그러니까 대통령도 그 사람들한테 끌려가기 시작했어요. 그 결과가 '각하 아니면 안됩니다'라는 3선 개헌입니다. 보세요, 3선개헌의 주동이 바로 그 사람들입니다.'
(조갑제출판국부국장기자) (이동욱월간조선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