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딸의 꿈
김계원비서실장은 27일 새벽2시를 넘어 청와대로 돌아왔다. 수석비서 관들과 이재전경호실차장을 비서실장실로 불렀다. 이차장이 단호하게 말 했다.
'유고의 내용을 상세하게 말씀해 주십시오. 우리 실장님은 지금 어디 에 계십니까.'.
김실장은 안경을 벗어 책상 위에다 놓았다. 두손으로 얼굴을 가리듯이 한번 비비고 나서 입을 뗐다.
'각하 돌아가셨어.' '어떻게 해서 돌아가셨습니까.' '한 사람의 맹동분자가 큰 일을 저질렀다. 각하 친족 중에서 우선 육 인수의원과 박재홍씨에게 연락하라.'.
김실장은 '경호실장도 죽었다'고 하면서 이차장을 향해서 지시했다.
'오늘 새벽 네시를 기해서 비상계엄이 선포된다. 계엄사령관과 긴밀 하게 협조하여 업무를 처리하시오.'.
김계원은 전석영총무비서관에게 '큰 영애에게 알리시오'라고 했다.
전비서관은 같은 층에 있는 둘째딸 근영양의 방문을 두드렸다. '급한 일 이 있으니 언니를 깨워달라'고 했다. 큰 영애 근혜가 나왔다.
'각하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지금 주무시고 계실텐데요.' '아닙니다. 엊저녁에 나가셨다가 안들어오셨습니다. 서거하셨습니다.'.
그녀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전비서관은 '실장님을 모시고 오겠습니다'라고 한 뒤에 실장실로 갔다. 그 사이에 큰 영애가 아버지 방에 가서 부재를 확인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대통령 침실 입구에 있는 거실은 전실로 불렸다. 거기서 김계원은 박근혜에게 '대통 령서거'를 통보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김실장은 이날 밤 여러 번 되풀이 했던 설명 그 대로 말했다. 김재규 가 경호실장을 향해서 잘못 쏜 총에 대통령이 돌아가셨다고. 큰 영애는 '휴전선은 괜찮으냐'고 물었다고 한다. 김실장은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그 이틀 전에 아버지에게 중요한 건의를 드 린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때 제가 여러 통의 편지와 건의서를 받았습니다. 시국을 걱정하는 분들이 보낸 편지고 건의서였는데, 거기에 종합된 의견은 아버지 주위의 몇몇사람들이 일을 망치고 있다, 그러니 그 사람들을 하루빨리 사퇴시키 지않으면 안된다 하는 건의였어요. 거기엔 차지철씨와 김재규 부장도 포 함되어 있었어요. 그래서 그것을 종합하여 제가 아버지께 종합적으로 다 말씀드렸어요. 그걸 굉장히 심각하게 들으셨죠. 중간에 전화가 어디서 왔거든요. 그전화를 받으신 후에 다시 자리로 돌아오셔서 얘기 계속 해 보라고, 그러시면서 또 들으셨어요.
그래서 그 얘기를 다 드리고 나니 아버지께서 알았다 아주 힘주어서 말씀하시는데 저는 아버지가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어떤 뜻이다 하는 걸 직감으로 알거든요. 아, 아버지가 마음에 어떤 결심을 하셨구나, 정보부장이 경질되겠구나, 저는 그렇게 믿었어요.' 전석영 비서관은 대통령의 시신을 모시고 오기로 했다. 일부 비서관들은 '아직 위험하니까 날이 밝은 뒤에 하는 게 어떻겠느냐'하는 의견을 냈다.
전비서관은 '날이 새면 천하가 다 알테니 빨리 모셔야 한다'고 주장 했다. 그리고는 근영의 방으로 올라갔다. 갈아입힐 검정색 계통의 양복 과 흰 와이셔츠, 그리고 넥타이를 달라고 했다. 근영양이 옷보따리를 들 고 전비서관을 따라나섰다. 전비서관은 청와대 현관을 나서다가 경호원 두 사람을 지목하여 따라오게 했다. 다른 직원들에게는 소접견실에 빈소 를 차리고 병풍과 촛불을 준비하도록 일렀다. 육영수여사의 상을 치러본 경험이 준비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박대통령과 첫째 부인 김호남 사이에 난 큰 딸 박재옥은 이날 주캐나 다대사인 남편 한병기를 따라서 카리브해의 작은 섬나라 도미니카 공화 국에 가 있었다. 한대사는 이 나라의 대사직도 겸임하고 있었다. 이 나 라의 독립기념일 행사에 초청되어 온 것이었다. 박재옥은 1년 반 전에 서울로 가서 아버지를 만난 것이 마지막이었다.
남편이 귀국하여 장인을 만나려고 해도 허가가 떨어지지 않는 것이 었다.
누군가가 아버지와의 접촉을 고의로 차단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독 재자란 아버지가 딸과 사위도 마음대로 부를 수 없다니 무슨 독재자가 이렇단 말인가'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한병기-박재옥 부부가 도미니카 공화국에 도착해보니 이 가난한 나라 는 며칠 전에 덮친 허리케인 때문에 엉망이 되어 있었다. 투숙한 호텔의 지붕도 날아가 없었다. 별이 총총 뜬 밤하늘을 바라보면서 잠을 청하는 데 주캐나다 한국대사관에서 급히 찾는다는 전갈이 왔다. 한국에서 큰일 이 생긴 것 같다는 것이었다. 박재옥은 가슴부터 철렁했다. 예감이 있었 기 때문이다. 그 전날 밤 그녀는 꿈속에서 아버지를 보았다. 박재옥은 남편이 그 전에 대사로 있었던 칠레에 가 있었다. 무슨 큰 행사인지 피 노체트 대통령도 나와 있었다.
그때 검은 색 자동차가 건물 앞으로 미끄러져 들어 왔다. 그 차에서 검은 색 옷을 입은 아버지와 육영수 여사가 내리는 것이 아닌가. 아버지 는 다른 사람들과 차례로 인사를 나누다가 큰 딸 앞을 그냥 지나가지 않 는가. 피노체트 대통령이 박대통령을 붙들고 '당신 딸이 여기 있다'고 소개했는데도 아버지는 모른 체하고 그냥 휙 돌아서 버렸다. 잠에서 깨 어난 박재옥은 식은 땀을 흘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검은 색 옷은 좋지 않은 징조라는데... 박재옥은 캐나다에 있을 때도 이상한 꿈을 꾸었다. 외교관 부인들과 함께 청와대를 방문했다. 박대통령은 누군가에 쫓기기 라도 하듯이 허둥지둥 무엇을 찾고 있었다.
'나는 가야 하는데...빨리 가야 돼. 아홉 시까지는 가야 돼. 그런데 이게 어디 갔나.'.
대통령은 열쇠를 찾고 있는 것 같았다. 박재옥은 '아버지 왜 그러세 요. 뭘 찾으세요. 제가 찾아드릴테니 혼자 가지 마세요'라고 애타게 말 을 걸었으나 아버지는 계속해서 서두르면서 어디론가 사라졌다. 주위를 둘러보니 검은 옷을 차려 입은 외교관 부인들이 울고 있었다.
한병기 대사 부부는 캐나다 대사관으로 전화를 걸었다. '대통령 유고' 라는 대답이 왔다. 박재옥은 이 생경한 말이 아버지의 죽음을 의미한다 고는 믿고싶지 않았다. 두 사람은 뉴욕으로 갔다. 한병기 대사의 친구들 이 나와서 귀국을 말리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대통령이 돌아가신 것 같다. 여기서 사태의 추이를 살펴보 다가 들어가는 것이 안전할 것 같다.'.
한대사 부부는 바로 도쿄행 비행기로 갈아 탔다. 박재옥은 '유고'의 의미가 납치나 부상이 아닐까, 최악의 경우에는 돌아가셨을 것으로 점치 고 있었다. 도쿄에서 마중나온 주일한국대사관의 이원홍공사가 대통령 서거를 전해주었다.(계속).
[조갑제 출판국부국장·이동욱 월간조선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