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병 환자
대통령병 환자
1966년, 틈새가 벌어지던 박정희-김종필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어떤 주석에 대한 흥미 있는 기록이 있다. 1월 초 김종필 의장은 박대통령을 청구동 자택으로 모시고 저녁식사를 대접하게 되었다. 초대받은 사람 가운데는 박상길 총무처 차관도 포함되어 있었다. 박정희가 최고회의 의장시절에 쓴 '국가와 혁명과 나'의 정리자이자 청와대 대변인 출신인 박상길은 이즈음 김종필의 원고를 교열해주고 있었다.
책명을 '조국과 민족과 역사를 위하여'로 결정하고 편집을 끝내고 인쇄소로 넘긴 순간 갑자기 김종필쪽에서 연락이 왔다. 인쇄보류를 요청해온 것이다. 저서출판은 야심을 너무 일찍 드러내는 일이라는 우려에서 출판을 보류키로 한 것 같았다.
사전통고에 따르면 청구동의 저녁식사 자리에는 대통령도 나온다는 것이었다. 박상길은 직감적으로 단순을 빙자한 단순치 않은 모임이란 생각을 했다. 참석을 하고보니 아래층 내실에 상을 차렸는데 과연 모인 면면들의 짜임은 묘한 데가 있었다(박상길 회고록-'나와 제3· 4공화국'에서 인용).
주빈은 대통령이고 주인은 김의장인데 일반 초청객은 엄민영 내무장관과 박상길이 이색적인 존재이고 나머지는 김종필 핵심측근으로 분류되는 너댓 명이었다. 얼마 안되어 밖이 소란해지면서 박대통령이 들어섰다. 이윽고 주안상이 들어오고 술이 몇 순배 돌았다. 분위기는 어딘가 모르게 어금니가 맞지 않았다.
밖에서 들으면 담론풍발이었으나 좌석의 공기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김종필 측근쪽에서도 분위기가 어색함을 의식하였던지 박대통령이 한 달 전에 지시한 공무원의 요정출입금지 조치를 화제로 올렸다.
'그래서 어쨌단 말인가.'
대통령이 응수했다.
'무조건 금지, 엄벌, 단속한다고만 되는 게 아닙니다. 왜 일들을 그렇게 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럼 자네들 말대로라면 마실테면 마셔라 하고 무조건 맡겨두라 그런 이야기지?'
대통령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어색함을 호도코자 하는 데서 술만 순배가 빨라져 박정희는 상당히 술이 올랐고 다른 사람들도 욕구불만 탓인지 정도를 넘고 있었다. 공무원 요정출입 금지란 화제는 어느덧 본격적인 토론주제가 되어버렸다. 대통령, 엄민영, 박상길이 한편이고 김종필 측근은 공격진영으로 편가름이 되었다. 엄민영은 이 문제의 단속부서 책임자, 박상길은 주관부서의 실질적인 책임자였다.
박상길은 집중포화의 표적이 되고 있는 대통령을 변호할 겸 화해도 붙일 겸해서 끼여들었다.
'여러분들 말씀에도 충분히 일리가 있습니다. 사실 겉으로 단속을 강화하면 지하로 숨어 비밀요정으로 빠지고 말씀대로 버려두면 아예 난장판이 되고 그러니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이렇게 해나가다 보면 안하는 것보다 나은 정도의 효과가 있을 것 아닌가, 하는 것이 각하의 생각이십니다.'
그러나 왁자지끌 떠들 뿐 박상길의 말은 먹혀들지 않았다. 엄민영은 원만한 성격 그대로 하하하 웃으면서 얼버무리려 했으나 잠자코 있는 대통령의 기색을 엿보니 무슨 일인가 터질 것 같았다. 역시 민감한 김종필이 박상길에게 다가와서 귀속말로 빨리 각하를 모셔가달라고 당부했다. 박상길은 기회를 엿본 끝에 '각하, 시간이 늦었습니다. 이만 일어나시지요'라고 권했다.
'아니오. 내 좀 여기서 볼일이 있소. 이 집 안방엔가 어디에 닛뽄도(일본도)가 있을 터인데 그걸 좀 가져와야겠소.'
박상길은 급히 대통령 곁으로 다가가 단단히 부여안고 밖으로 모셨다.
'내가 닛뽄도로 이 쓸개빠진 자들의 목을 댕강댕강 치기 전에는 돌아갈 수 없소.'
간신히 대통령을 차에 싣고 출발했다. 뒷자리에선 박상길이 대통령을 부축하고 운전석 옆자리에는 경호관이 앉았다. 차가 대연각 앞까지 오니 대통령이 명동 입구쪽에 차를 세우라고 명했다.
'내 이 안쪽에 아는 데가 한 곳 있는데 거기 가서 둘이서 술 딱 한잔만 더하고 갑시다.'
억지로 차를 청와대로 몰게 하는데 이번엔 앞자리의 등받침대 위에 구둣발을 올려 뻗치고는 경호원의 뒷통수를 톡톡 치면서 왜 차를 안세우느냐고 투정을 부렸다. 대통령은 자신의 몸을 꼭 껴안고 있는 박상길의 머리를 두 손으로 잡아당기더니 두서너 번 박치기를 했다.
청와대 본관에 들어서서 복도를 지나 2층 내실로 모시려고 하는데 육영수 여사가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지금이 대체 몇시인데 어쩌다 이 모양이 되셨어요'라고 짜증을 냈다. 박대통령이 비서관의 도움으로 내실로 모셔지고 나서야 박상길은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있는데 돌연 쾅하고 문이 열리더니 대통령이 다시 뛰쳐나왔다. 느닷없이 권총을 찾는다.
'내 권총으로 그 쓸개빠진 대통령 환자놈들을 확 쓸기 전에는 잠을 못잔다!'
다시 한 바탕의 소란 끝에 대통령이 잠에 든 것을 확인한 박상길은 집으로 돌아갔다. 몸은 식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박상길은 회고록에 '그날 저녁의 청구동 작전은 실패였다'고 썼다.
<모두들 꾹 참고 차분하게 화제와 분위기를 이끌었다면 그같은 역효과는 없을 성도 싶었다. 대통령이 먼저 대통령 환자라고 소리지르신 터에 어찌 정상적인 정치가 두 분 사이에 건재할 수 있었겠는가. 내 개인의 견해로도 김의장 쪽이 '왜 그리 서두는 것일까'하는 회의가 항상 머릿속에서 떠날 수가 없었다.>
(조갑제출판국부국장기자) (이동욱월간조선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