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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카 박재석의 경우
 조카 박재석의 경우
 
 조카 박재석의 경우
 
 1961년 가을, 최고회의 의장 박정희의 조카 박재석(77·둘째형 박무희씨의 장남)은 대구에서 고물 트럭 두 대로 운수업을 하고 있었다. 집안 형편이 어려웠던 1950년대엔 박재석이 전방에 근무하던 삼촌 박정희를 찾아가 쌀과 생활비를 얻어 오기도 했고, 박정희가 이혼 문제로 고민을 할 때엔 박재석에게 심정을 털어 놓고 이혼수속을 부탁하기도 했었다. 박재석보다 다섯 살 위인 삼촌이 최고회의 의장이 되자 그의 주변에서는 사업을 함께 하자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그들은 원조자금으로 수입되는 원목들을 부산 앞바다에 둥둥 띄워 놓고 보관료만 받으면 되는 목재보관업을 하자며 박재석을 설득했다. 목재보관업은 큰 자본이나 기술이 필요없고 정부가 허가만 해 주면 돈을 벌 수 있다는 설명이었다. 박재석의 역할은 정부관리를 설득해 계약을 성사시키는 일이었다. 박재석은 농림부 장관 장경순 준장을 만나 '각하의 가족인 저희들도 먹고 살 수 있도록 목재 보관업이나 하게 해 주십시오'라고 부탁했다. 장경순 장관은 '그럼요, 도와 드려야지요'라며 담당국장을 불러 도와주라고 지시했다. 목재보관업은 그동안 자유당 출신 국회의원 최모씨가 매년 정부와 계약을 갱신하면서 운영해 왔다. 그것이 하루아침에 최고회의 의장의 인척에게 넘어간 셈이 되었다.
 
 1962년 초 계약이 성사되자 박재석과 동업자들은 부산 상공회의소 2층의 40평 되는 방을 빌려 여직원과 전화를 둔 사무실을 차렸다. 한 달쯤 지났을 때 박재석은 부산 시경국장 박영수 헌병대령으로부터 만나자는 전화를 받았다. 박 시경국장은 찾아 온 박재석에게 하소연했다.
 
 '아이고, 종씨어른. 이거 말이 많아서 안되겠십니더. 최모라 카는 국회의원이 서울 시내 다방에 당기면서 얼마나 떠들어 놨던지….' '누가 뭐라 카는데요.'
 
 '거, 목재보관업 해 오던 양반 안 있습니꺼. 지가 몇십년 해 오던 것을 빼앗아 묵었다고 온 동네 소문을 내는 통에 어른(박정희)께서 노발대발이십니더.' '자유당 출신들은 평생 해 묵고, 우리는 해 묵으면 안됩니까. 우째야 됩니까.'
 
 '죄송하지만, 당장 사업 그만두셔야 하겠십니더. 저를 봐서라도 회사 문 좀 닫아 주이소.'
 
 박재석은 그 길로 회사를 정리해야만 했다.
 
 1962년 4월20일, 박재석은 기분전환을 할 겸 장모와 처, 다섯 살바기 둘째 아들과 함께 서울 창경원에서 열리는 5·16 산업박람회를 구경하러 상경했다. 최고회의 의장 친인척의 경호 및 감시를 담당하던 경북 선산 지서 정보과 장영택 형사도 동행했다. 박재석은 남대문 옆 작은 호텔에 방을 얻었다. 장형사는 바로 옆 방을 얻은 뒤 상부에 동향 보고를 했다. 다음날 아침 박재석은 장형사로부터 '각하께서 장충동 공관으로 들어오시랍니다'란 전갈을 받았다.
 
 아들 손을 잡고 의장 공관으로 들어선 박재석은 '너희 할아버지가 이 나라에서 제일 높은 분이다'라고 자랑스레 설명을 해 주며 2층으로 올라갔다. 박정희는 목욕을 마친 뒤 가운차림에 수건을 목에 감고 나오다가 인사를 하는 조카를 발견했다. 박정희는 눈에 불꽃이 튈 만큼 노한 표정이 되어 야단을 치기 시작했다. 소파에 앉으려던 박재석이 다시 일어섰다.
 
 '너, 이놈 잘 왔어. 너 부산서 사업한다며?' '걱정하신다해서 그만 두었습니다.'
 
 박정희는 점 점 더 고성으로 변해갔다.
 
 '잘 그만 뒀어! 야, 이놈아. 내가 이놈, 너 사업해서 부자 만들어 주려고 혁명한 줄 알아? 이놈 이거… 이 나쁜 놈아… 이 삼촌이 네가 돈 버는 거 배가 아파 이러는 줄 알아?'
 
 아버지를 따라 갔던 다섯 살바기 둘째 아들은 대한민국에서 제일 높은 할아버지가 아버지를 야단치는 모습을 보고 겁에 질려 울음을 터뜨렸다. 박재석은 그런 아들의 손을 꼭 잡고 삼촌 박정희 앞에서 머리를 조아렸다.
 
 '너, 이놈아. 친인척들이 그런데 관여해서 이권이나 챙긴다고 소문이 나면 이 삼촌은 3000만 국민앞에서 할복자살하고 사과해야 된단 말이다! 그런 거나 알고 있어?'
 
 박재석은 그 말을 듣는 순간 하늘이 노랗게 변하는 것 같았다고 한다.
 
 '어르신 뜻을 잘 몰랐습니다. 앞으로 초근목피를 캐어 먹는 한이 있더라도 관청을 상대로는 사업 같은 것은 안하겠습니다.' '그래야지! 너 힘으로 살아! 너 자유업 하는 거 아무말 안해. 잘 생각했어!'
 
 '그럼, 어르신. 이만 가 보겠습니다.'
 
 박재석은 아들 앞에서 민망하기도 하여 어서 빨리 그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다. 박정희가 박재석을 불러 세운 뒤 부관을 불렀다. 김성구 중위가 달려 나왔다.
 
 '거, 돈 10만환 가져와.'
 
 박정희는 1000환짜리 100장이 든 누런 봉투를 받아 조카앞에 던져주면서 계속 꾸중을 했다.
 
 '이거 가지고 가서 여비해서 내려가. 그리고 산업 박람회 왔으면서 호텔에는 왜 들어가노? 신당동에 내 집도 있는데 거기 가서 자고 구경하고 내려가.' '어르신, 저도 30만환 가져 온 거 있습니다.'
 
 '마, 어른이 주면 받는 거야!'
 
 박재석은 그 길로 대구로 내려가 운수업을 계속했다. 한때는 지프차를 개조해 택시 사업도 했지만 교통순경들이 자주 벌금을 물리는 통에 경북 경찰국장실을 찾아가 '대통령 가족들을 도와주지는 못할 망정 매일 딱지를 떼니 못살겠소'라고 항의하자 경찰국장이 교통과 경찰들에게 '앞으로 이 차량번호에는 손대지 마'라고 지시했다.
 
 운수업으로 약간의 돈을 모으게 된 박재석은 선산의 가족 묘를 새로 단장하는 등 묵묵히 집안 대소사를 도맡아 했다. 1972년에 그는 두 번 부도가 난 변압기 제조회사 국제전기를 인수했다. 때마침 새마을 전화사업 바람을 타고 매년 흑자경영을 했다. 사업을 확장하려 했지만 은행에서는 대통령 가족이란 사실을 알고 대출을 해 주질 않았다. 박재석은 1977년에 코오롱 상사에 회사를 매각한 뒤 조용히 여생을 보내는 중이다.
 
 '그때는 삼촌 때문에 불이익도 많이 받았습니다. 삼촌이 그렇게 매정할 수가 없었지요. 지금은 생각이 다릅니다. 만약 그때 삼촌 말을 듣지 않고 공공사업에 손을 댔더라면 10·26이후에 결코 무사하지 못했을 겁니다.'
 
 (조갑제출판국부국장기자) (이동욱월간조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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