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 방문 길
군대를 해외에 파견한다는 것은 한 국가의 영향력이 해외로 전개된다는 것 을 뜻한다. 원정군을 따라 기업인도 가고 기술자도, 장사꾼도 가게 되는 것 이다. 그리고 외교관도. 한국이 軍團(군단)규모의 대병력을 월남에 파견함 으로써 우리의 외교도 해외로 뻗기 시작했다. 朴대통령 치하의 해외방문과 頂上(정상)회담은 1961년의 미국 방문과 1964년의 독일 방문을 제외하곤 모두 越南派兵期(월남파병기)에 이루어졌다.
1966년 2월7일 오전 朴대통령은 서독 루프트한자 항공사로부터 전세낸 보잉 707기를 타고 말레이시아 - 태국 - 자유중국 방문 길에 올랐다. 떠나는 서 울은 영하 10도였지만 도착할 곳은 赤道(적도) 부근. 수행원들은 비행기에 탈 때 코트와 점퍼를 벗어 환송나온 가족들에게 건네주기도 했다. 제주도 上空(상공)을 지날 때 朴대통령은 앞쪽에 설치된 특별실에서 나와 기자들을 찾아왔다. 기자들이 빙 둘러싼 가운데 朴대통령의 당부가 있었다 . 국가의 체면을 구기는 행동을 하지 말라는 요지였다.
『후진국의 경제개발은 이웃나라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습니다. 무역전쟁이 란 말도 있듯이 교역의 증진을 위해서 외교를 해야 합니다. 지난 해외방문 은 아쉬운 소리를 많이 해야 되는 형편이었으나 이번에는 서로 돕자고 가는 것이니 무척 기분이 홀가분하군요』
이어서 洪鍾哲(홍종철) 공보부 장관이 老人風(노인풍)의 훈시를 하더니 기 자들이 다 알고 있는 동남아 정세에 대해 지루하게 설명을 이어갔다. 朴대 통령은 機內食(기내식)으로 나온 독일 빵과 맥주를 마시면서 『우리도 이렇 게 맛있는 빵을 만들어 粉食(분식)을 장려할 수 있었으면』하고 부러워했다 . 비행기가 남지나해 상공을 지날 무렵 朴대통령은 김포 출발 직전 브라운 대사가 전달한 존슨 미국 대통령의 親書(친서)를 검토하고 무전으로 청와 대에 지시를 내렸다.
원래 朴대통령은 필리핀도 방문할 계획이었다. 李東元 외무장관이 교섭을 했더니 마르코스 대통령의 바쁜 日程(일정) 때문에 만날 입장이 아니란 연 락이 왔다. 이런 이유로 우방국 원수의 방문을 거절하는 것은 외교적인 결 례이다. 이 상황을 보고하러 들어간 李장관 앞에서 朴대통령은 이렇게 말했 다고 한다(李東元 지음, 「대통령을 그리며」에서 인용).
『건방진 놈. 두고 보라지. 앞으로 우리가 몇년內 필리핀을 앞설 테니. 그 리고 10년 후에는 우리는 선진국이 되고 필리핀은 영원히 후진국으로 남을 테니 두고봐』
朴正熙와 마르코스는 강력한 통치자란 점에서 공통점이 있었다. 朴正熙는 18년, 마르코스는 21년을 장기집권했다. 두 사람의 인상도 비슷했다. 두 사 람의 성적표는 오늘의 한국과 필리핀의 차이만큼 다르다. 朴正熙가 집권한 1961년 무렵 우리 정부 안에서는 파키스탄(당시 아유브 칸 장군이 쿠데타 로 집권하여 정력적으로 근대화를 추진하고 있었다)과 필리핀을 따라배워야 한다는 분위기가 생길 정도였다. 미8군이 발주한 건설공사에 필리핀 회사 가 시공자로 들어가면 우리 건설회사는 하청회사로서 그 밑에서 일하는 경 우가 많았다. 아유브 칸과 마르코스의 근대화는 실패하고 朴正熙의 근대화 는 왜 성공했는가.
여러 가지 이유 가운데 결정적인 점은 농지개혁의 문제였다. 李承晩(이승만 ) 대통령이 지주정당인 한민당과 그 영향권 아래에 들어가 있던 언론의 반 대를 무릅쓰고 밀어붙여 6·25 남침전쟁 직전에 거의 마무리했던 농지개혁 은 地主(지주)계급의 몰락, 토지자본의 산업자본화, 그리고 공산화의 예방 이란 효과를 남겼다.
6·25 새벽의 기습으로 남한의 대부분을 점령한 북한 인민군이 地主들의 토 지를 몰수하여 소작농들에게 나누어주었더라면 농민들의 지지를 얻어냈을 것이다. 그리하여 국군과 유엔군이 반격할 때 많은 농민들은 자기 것이 된 농토를 지키기 위해서 인민군 편에 섰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李承晩이 전 쟁 직전에 농지개혁을 끝냈기 때문에 인민군이 해줄 것이 없었다. 오히려 많은 농민들은 자기 몫이 된 땅을 지키기 위하여 공산 침략군에 저항하고 반대했다.
그러한 농지개혁이 되지 않았던 파키스탄과 필리핀에서는 地主 출신 정치인 과 군인들이 기득권 세력의 파수꾼이 되어 국민들의 욕구와 복지를 희생시 키는 守舊(수구) 세력의 첨병 역할을 했다. 朴正熙 같은 가난한 농민 및 서 민 출신이 장교단을 형성하고 있어 군대가 개혁적인 성격을 띠고 있던 한국 과는 반대로 이 두 나라의 장교들은 일부 상류층의 기득권을 수호하는 反개 혁 세력의 走狗(주구) 역할을 했다.
이 두 나라는 민주주의 체제를 간판으로 내걸었으나 그것도 地主 출신 정치 인들끼리의 민주주의, 게임화한 민주주의에 불과했다. 정치인들은 당파와 지역, 그리고 집안 이익의 대리인이지 국가 전체를 대표하는 엘리트는 되지 못했다. 대다수 서민들은 기득권층이 벌이는 권력투쟁의 구경꾼이거나 피 해자였고 국가가 방치한 높은 문맹률은 이들의 정치참여를 더욱 제한했다. 반면 서민층에 뿌리를 둔, 朴正熙를 중심한 한국군의 장교단은 당파, 지역 의 이해관계를 뛰어넘고 국가와 국민의 전체이익을 기준으로 정책을 펴는 국가 엘리트로 변신했다. 이것이 朴正熙와 마르코스, 한국과 필리핀의 차이 를 만들었다. 장기집권한 지도자는 세계 도처에 많지만 그렇게 해서 확보한 권력으로써 근대화를 성공시킨 지도자는 드물다. 마르코스는 朴正熙와는 달리 권력을 자신과 가족, 그리고 기득권층의 이익을 지키는 수단으로 주로 이용했던 반면에 朴正熙는 권력을 국가와 국민 전체의 발전에 활용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朴正熙의 성공엔 농지개혁, 建軍(건군), 한미상호방위조약 , 교육확충이란 근대화 인프라를 먼저 만들어준 李承晩의 큰 기여가 뒷받침 하고 있었다.
1966년 가을 필리핀의 마르코스는 일본을 방문하는 길에 한국에도 들르고 싶다는 뜻을 李東元 장관에게 전해왔다. 朴正熙 대통령은 이렇게 잘라버렸다.
『흥! 여길 오겠다고? 그 친구한테 당장 전보 치시오. 나 시간 없다고 해요』李東元은 朴正熙가 내심 이렇게 마르코스를 경멸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썼다. 「건방진 놈, 제까짓 게 대통령이 된 지 일년도 안된 게 마치 아시아의 해 결사라도 된 양 까불고 있어. 지가 큰소리 치고 싶으면 우선 필리핀이나 발 전시켜놓고 봐야지. 하여튼 이 자는 입만 까진 친구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