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운 각서
1966년 3월7일 윈스롭 브라운 주한 미국대사는 외무부로 李東元 장관을 방 문하여 「한국군의 월남增派에 따른 선행조건의 양해사항 공한」을 전달했 다. 「브라운 각서」로 유명해진 이 문서는 2월25일의 이동원-브라운 합의 사항을 문서화한 것이었다. 각서는 朴正熙 정부가 1개 사단의 전투병력을 추가파병하는 조건으로 미국측에 요구한 것들이 거의 충족된 내용이었다. 李東元은 미국측에 대해 韓美 상호방위조약을 개정하여 한국이 침략을 받을 때 미국이 의회의 승인 없이 자동개입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구했으나 미국 정부는 이것만은 들어줄 수 없었다. 그 대신 험프리 부통령으로 하여 금 한국방위에 대한 미국 정부의 의지를 강력히 천명하게 했다. 미국은 한 국군의 장비 현대화, 한국군 파병에 따른 경비의 전액부담, 파병된 한국군 에 대한 처우개선, 전쟁으로 형성된 特需(특수)에 한국인들이 참여할 수 있 도록 보장하는 등 14개 조항을 약속했다. 이것은 朴正熙 정부의 對美외교에 서 하나의 금자탑이었다. 조국의 젊은이들이 他國(타국)을 위하여 생명을 바치고 피를 흘린다는 상황을 외교교섭에 최대한도로 활용하여 국익을 도모 한 것이다. 이 각서의 정신에 따라 한국측은 월남전 기간에 약 10억 달러의 수입을 전쟁 特需로써 올릴 수 있었다. 브라운 각서의 요지는 이러했다. <①3개 예비사단의 완전장비화, 17개 육군사단과 1개 해병사단의 장비 현대 화, ②월남증파에 따른 모든 장비와 원貨(화)경비는 미국이 부담, ③월남파 병에 따라 한국군을 보충해야 할 경우 이에 필요한 장비와 훈련경비는 모두 미국이 부담, ④북한의 간접침략을 봉쇄하기 위한 장비 제공, ⑤탄약자급 을 위해 兵器廠(병기창)을 건설하기 위한 시설 제공, ⑥한국 정부와 派越( 파월)부대 사이의 전용통신 시설을 미국측이 제공, ⑦증파병력과 그 보충병 력을 한국내에서 보충·유지하는 데 드는 純(순)추가비용의 전액을 원화로 한국 정부에 제공, ⑧한국측에 부담이 되는 軍援移管(군원이관) 계획의 보 류, ⑨주월한국군을 위한 물자 용역 장비 등을 한국내에서 조달하며 주월미 군 및 월남군의 군수품도 한국제품을 구입하여 쓰도록 노력, ⑩미국국제개 발처(AID)가 월남에서 추진하는 농촌건설 및 선무 구호사업에 들어가는 보 급품을 한국에서 구입한다, ⑪월남에서 이루어지는 건설사업에 한국인 민간 기술자의 고용 및 용역의 기회를 확대한다, ⑫한국의 수출진흥을 위한 기술 원조를 강화, ⑬1억5천만 달러의 AID 차관을 조기사용토록 하며 경제개발을 위하여 더 많은 AID 차관을 제공한다 ⑭금년도 재정안정계획을 위하여 금 년 안으로 우선 1천5백만 달러의 신규원자재 구입용 차관을 제공한다> 丁一權(정일권) 국무총리는 파병동의안을 심의하고 있던 국회에 나와 『미 국 정부로부터 현 수준의 주한미군 병력을 계속 유지한다는 문서상의 보장 을 받았다』고 말했다. 월남增派에 따라 정치권은 국회와 언론을 매개로 하 여 활발한 찬반논쟁을 벌였다. 우리 정치가 오랜만에 안보·외교를 주제로 삼아 진지한 토론을 벌여 정치 본래의 생산적인 모습을 보여준 경우이다. 기자 출신인 徐仁錫(서인석) 공화당 의원은 여당內의 파병반대론자로 적극 적으로 소신을 밝혔다. 그는 신문기고문 등을 통해서 「선전포고 또는 전쟁 상태 선언을 내리지 않더라도 4만 이상의 국군이 베트남과 교전하는 사태는 우리나라가 전쟁상태에 돌입한 것을 의미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서 「우리는 우리의 국가목표 - 남북통일 - 를 실현하는 전쟁 이외의 전쟁을 수행할 여유가 없는 처지에 있다」고 했다. 徐의원은 「월남의 사태는 우 리의 지배요인보다 敵(적)측의 지배요인으로 결정되는 듯이 보인다」면서 「우리는 대병력을 보내 우리가 지배할 능력이 없는 사태에 우리가 개입함 으로써 거꾸로 우리의 운명을 그곳 사태발전에 맡기고 있는 것이 아닌가 우 려된다」고 했다.
그는 이어서 「피할 수 없이 助演(조연)을 맡은 우리는 주연이 연극을 끝낸 후에 혼자서 춤을 추는 愚(우)를 범하기가 쉽다」면서 「외교는 그때그때 의 국가 이익에 순응해서 행하여지는 것이지 서민들이 빚을 갚는 식이 되어 선 곤란하다」고 비판했다. 朴대통령은 徐의원의 增派반대론에 대해서는 『반대를 하려면 徐의원처럼 논리를 세워서 해야 한다』면서 기분 나빠하지
않았다고 한다.
야당인 민중당의 金俊淵(김준연) 의원은 『베트콩을 조종하는 것은 월맹이 고 월맹을 조종하는 것은 중공이며 월남이 공산화되면 동남아시아 전체가 그렇게 될 것이다』면서 增派에 찬성했다.
1개 사단과 1개 연대(파월된 맹호사단의 잔류부대)의 增派동의안은 3월20일 국회 본회의에서 찬성 95표 반대 27표 기권 3표 불참 50명으로 통과되었다 . 朴대통령은 增派사단으로 보병 9사단을 선정했다. 백마부대로 통칭된 이 사단은 1950년 朴正熙 중령이 참모장으로서 창설을 지도했던 부대이기도 했다. 휴전선에 이어 월남에 제2전선을 갖게 된 1960년대의 한국은 준전시 상태와 같은 긴장되고 들뜬 사회분위기 속에서 경제성장으로 매진하게 된 다. 한때 한국은 인구비례로서는 미국보다도 더 많은 병력을 월남에 보낸 적이 있다. 戰線을 가진 국가답게 언론과 방송에는 군인과 軍歌(군가)들이 자주 등장했고 勝戰(승전)소식과 함께 戰死 통지서가 날아오기 시작했다. 미국과의 약속에 따라 朴대통령은 4월6일 환송식을 갖고 맹호부대(수도사단 )의 잔류연대를 월남에 보냈다. 3천5백명으로 편성된 이 연대는 惠山鎭(혜 산진)부대라 불리게 되었다. 6·25 전쟁 때 압록강변 혜산진에 가장 먼저 도착한 부대였다는 데서 유래했다.
혜산진 부대가 부산항을 향해서 떠나는 4월8일 밤 청량리역에선 軍歌 합창 소리가 울려퍼지고 태극기가 물결쳤다. 戰線으로 아들을 보내는 부모들은 차창 밖으로 내민 손을 잡고 무사귀환을 빌었다. 인천에 산다는 尹昌天(윤 창천) 할머니는 맏아들인 鄭成圭(정성규) 병장의 손을 잡고 놓지 않았다. 鄭병장은 철모르는 아우 成雲(11세)에게 『내가 못 돌아오면 네가 노부모를 잘 모셔야 한다』고 당부하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