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조선  |  조선일보  |  독립신문  |  미래한국  |  올인코리아  |  코나스넷  |  라이트뉴스  |  리버티헤럴드  |  뉴데일리  |  뉴스파인더
    
   


기사 확대  기사 축소  

崔圭夏 대사
 崔圭夏 대사
 
 1966년 2월8일 밤 8시30분, 라만 수상관저에서 열린 만찬에 참석한 朴대통 령은 63회 생일을 맞은 수상에게 선물을 전달했다. 만찬이 무르익을 즈음 케임브리지 대학교 법학박사 출신의 라만 수상은 朴대통령에게 많은 조언 을 해 주었다. 라만 수상은 이날 오전 라자크 부수상이 설명한 말레이시아 의 고민에 대해 『우리가 앓고 있는 병은 곧 완쾌될 겁니다. 그때까지는 선 진국 문명이라는 약을 써야 합니다』라고 말하면서 한국을 거론했다.
 『우리나라는 다행히 고무나무가 많아서 그럭저럭 살고 있지만 천연자원이 란 한계가 있다는 점이 걱정입니다. 오히려 한국은 풍부한 인적 자원이 있 어 그것이 부럽습니다. 특히 한국 여성들이 근면하고 성실하기로 소문이 났 던데 이들 인적 자원을 잘만 개발하면 괜찮을 겁니다. 한국이 경제개발을 하려면 돈이 필요할 텐데, 돈 빌리는 것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빚도 가지고 오면 내 재산이고, 특히 돈 빌리는 재주는 더 큰 재산이지요. 그러 니 유능한 외무부 인재들을 잘 활용해 세계의 돈을 끌어다 쓰십시오』
 
 『라만 수상 각하, 임기가 끝나면 한 번 더할 생각이십니까?』
 
 『아닙니다. 남들은 날 國父(국부)라고 부르며 오래 하라고 하지만 내가 학 교에서 배운 바에 의하면 장기 집권은 神(신)에 의한 것이라 할지라도 바람 직하지 않다는 겁니다. 그래서 나는 물러날 생각입니다』
 
 
 『그럼, 물러난 뒤엔 뭘 하실 생각이십니까?』
 
 『옛날엔 독립운동하느라 시간이 없었지만 저는 학창시절부터 해 보고 싶은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축구 감독이고, 다른 하나는 영화 감독입니다』朴대통령은 라만 수상의 이 말을 정치적인 쇼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만찬 이 끝난 뒤 수상 관저를 나오면서 朴대통령은 李東元 외무장관에게 비꼬듯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라만 수상, 그 양반 말 참 재밌게 하네. 후에 정말 재미있는 영화 만들겠어』
 
 李東元은 그의 회고록 「대통령을 그리며」에서 이렇게 후기를 쓰고 있다. <라만은 끝내 약속을 지켰다. 1973년 수상 자리에서 물러난 그는 은퇴 후 감독은 아니었지만 축구 단장으로, 또한 직접 시나리오를 쓰며 영화를 제작 하는 등 학창시절의 꿈을 이루었다. 우린 여기서 朴대통령과 라만의 정치의 식 수준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후진국의 경우 정치와 경제 중 어느 것이 먼저냐 하는 점인 것 같다. 만일 당시 라만과 朴대통령이 서로 바뀌었더라면 오늘의 한국은 어땠을까. 「개발독재」를 비난하면서도 이 점 곰곰 생각해 볼 일이다>
 
 2월9일, 말레이시아 방문 사흘째를 맞은 朴대통령은 오전 10시부터 말레이 시아 국회의사당 특별실에서 라만 수상과 공식회담을 가졌다. 한국측은 張基榮(장기영)부총리, 李東元 외무장관, 金聖恩 국방장관, 洪鍾哲(홍종철) 공보부 장관, 李厚洛(이후락) 비서실장, 崔圭夏 주말레이시아 대사 등이 참 석했고, 말레이시아측에서는 라자크 부수상을 비롯하여 재무, 문교, 상공, 공보상 및 재무 차관 등이 참석했다. 약 두 시간 동안 계속된 이 수뇌회담 에서 양국 지도자는 월남문제를 중심으로 동남아 정세 전반에 걸친 의견을 나누었으며 월남국민을 지원할 필요성에 합의했다.
 
 이 회담이 끝난 뒤 별도로 열린 양국 경제각료회담에서는 ①말레이시아의 제3차 5개년 계획에 대한 한국의 적극적인 참여와 한국의 제2차 5개년 계획 에 대한 말레이시아의 지원 ②천연자원이 풍부한 말레이시아와 노동력이 남 는 한국 간의 합작투자로 공장을 건설하는 문제들을 의논했다. 오후 1시, 朴대통령 부부는 라만 홀에서 열리는 한국미술전시회를 관람한 뒤 1시 30분경 崔圭夏 대사 관저에 도착, 韓式(한식)의 오찬을 나누었다. 하루 전 朴대통령은 李厚洛 비서실장에게 韓食을 먹고 싶다는 표시를 했고 , 교민이 많지 않은 당시 말레이시아에서 李실장은 崔대사의 관저에 韓式 오찬을 마련토록 했던 것이다. 이날 오찬을 즐긴 朴대통령은 다음날 李東元 장관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내 어제 崔대사 집에 가지 않았소. 헌데 崔대사 정말 애국자야. 글쎄 그 친구집에 가보니 술이나 안주가 몽땅 한국 거더라구. 게다가 날 접대한다 고 고무신 신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걸 보니 꽤 부지런하던데…』崔圭夏는 외무부 대기대사로 근무하던 중 李東元 장관의 발상으로 아스팍( ASPAC·아시아 태평양 협력기구체) 계획을 추진한 일등공신이었다. 李장관 은 崔대사의 공로를 인정해 朴대통령에게 영국 대사로 추천했었다.
 
 『누구? 최규하라…. 난 잘 모르겠는데…. 아, 거 자유당 시절 외무차관 했 던 그 사람? 안 되오. 그런 사람을 어떻게 혁명한 정부에서 쓰나』朴대통령은 강력히 반대했지만 李장관도 굽히지 않았다. 李장관은 한국의 지위를 격상시키기 위해서는 외교관의 자질이 중요하다고 보고 가능한 한 軍 출신 외교관들을 줄이는 중이었다.
 
 
 『각하, 그럼 말레이시아 대사로 보내겠습니다』
 
 『그럼 지금 있는 崔泓熙(최홍희) 대사는 어쩌고?』 짜증스런 말투였다.
 
 
 『불렀다가 다음에 자리가 나면…』
 
 『알아서 하시오』
 
 朴正熙는 손을 내저으며 내뱉듯 말했다. 결국 崔圭夏는 朴대통령의 곱지 않 은 눈길을 뒤로 한 채 말레이시아 대사로 부임했다. 물러난 崔泓熙가 캐나 다로 망명하여 反朴 운동을 벌이게 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말레이시아 대사관저에서의 午餐(오찬)은 朴대통령이 崔圭夏 대사에 대한 인상을 바꾸는 계기이기도 했다. 朴대통령은 털털하고 청렴 소박하며 천부 적으로 성실한 崔圭夏를 좋아하기 시작했다. 이후 그는 아스팍 초대 사무총 장이 되어 朴대통령과 자주 독대하며 자신의 능력을 드러낼 수 있었고 외무 장관(1967년), 대통령 외교담당 특보(1971년), 국무총리(1976년)에 이어 1 0·26 이후엔 대통령 자리까지 오른다.
 
 1966년 2월9일 오후 5시부터 李東元 외무장관과 라만 수상(외상 겸직)은 별 도의 외상회담을 갖고 ①자유아시아 지도자급의 공동방위를 위한 의견교환 체제와 외상급 회의 ②한·말 경제 문화관계 각료급의 정기적인 회담 ③아 시아·아프리카 중립국에 대한 친선외교의 상호협력 방안 ④한·말 공동시 장 설치 ⑤라자크 부수상의 방한문제 등을 협의했다. 이 중 「자유아시아 지도자급의 공동방위를 위한 의견교환 체제와 외상급 회의」는 8개월 뒤 「 월남참전 7개국 정상회담」으로 결실을 맺는다.
 
 말레이시아에서의 마지막 날인 이날 밤 朴대통령 내외는 셀란고르 클럽에서 만찬을 열어 국왕 부처와 수상 부처 및 각료들을 초청, 감사를 표했다. 일 행은 이튿날 오전 9시30분 수방 공항에서 전세기로 다음 기착지인 태국으로 향했다.
 
기사목록  프린트하기 

조선일보 | 스포츠조선 | 주간조선 | 소년조선 | 여성조선 | NK조선 | IT조선 | 잡지DB

서울특별시 종로구 신문로1가 163 광화문 오피시아 1729호  |  대표자 : 조갑제  |  사업자등록번호 : 101-09-63091
상호 : 조갑제닷컴  |  개인정보관리 책임자 : 김동현  |  전화번호 : 02-722-9411~3  |  팩시밀리 : 02-722-9414 |
    개인정보취급방침

발행인 : 조갑제 | 편집인 : 조갑제 | 등록번호 : 서울아00945 | 등록일 : 2009/08/24 | 국민은행 360101-04-065553(예금주: 조갑제닷컴)
webmaster@chogabj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