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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면
 라면
 
 1966년 2월12일 오전 11시, 朴대통령 부부는 부미볼 국왕 부부의 안내를 받 으면서 태국 건축의 精髓(정수)라 할 그랜드宮과 태국內 1천9백개의 寺院( 사원) 중 최고로 꼽히는 에머랄드 寺院을 구경했다. 부미볼 국왕은 에머랄 드로 만들어진 불상 앞에서 『15세기에 조각되어 18세기 말에 여기에 안치 된 이 불상은 태국의 국보입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국왕인 제가 부처의 옷을 갈아입힙니다』라고 설명해 주었다. 朴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고려 팔 만대장경 번역판 19권을 증정했다.
 이날 밤 8시 朴대통령 부부는 살라 사하타이宮에서 부미볼 국왕 부부와 타 놈 수상 부부를 비롯 태국 정부각료 일동, 3군 수뇌 및 駐(주)방콕 외교사 절 등 90여명의 인사들을 초청해 만찬을 베풀었다.
 
 朴대통령 부부는 赤道에 가까운 국가에서 연이어 벌어지는 공식만찬에 참석 하느라 식사에 애를 먹었다. 찌는 듯한 더위에 눈살이 찌푸려지지 않도록 한복 차림에 검은 안경을 써야 했던 陸英修는 출발 전부터 자신은 더위에 약하다며 가지 않을 수 없느냐고 朴대통령에게 사정하기도 했다고 한다. 現地(현지)에서 陸여사는 더위뿐 아니라 신발이 맞질 않아 고충이 더 했다. 한복을 입으면 상체가 뒤로 약간 젖혀지는 것을 방지하고자 고무신이 아닌 굽이 약간 높은 구두를 신은 게 화근이었다. 당시만 해도 국산 구두는 신 축성이 약하고 딱딱해 발이 약간만 부어도 신을 수 없을 정도였다. 종일 시 찰과 방문, 공식행사에 참석한 뒤 밤늦게 숙소로 돌아오면 陸여사의 발은 퉁퉁 부어 있었다. 陸여사는 부기가 가라앉지 않으면 다음날 신발을 신지 못할까 걱정하면서 찬물을 떠다 놓고 발을 담그곤 했다.
 
 수행비서가 陸여사에게 『사모님, 가게에 나가 편한 구두 한 켤레 구해 오 면 어떨까요?』라고 하자 그녀는 『그게 무슨 소리예요? 내가 이곳에서 구 두를 샀다고 소문이라도 나 봐요. 나라 체면이 어떻게 되겠어요?』라며 거절했다. 다음날 아침이면 陸여사는 부기가 채 가시지 않은 발을 억지로 구두에 끼워 신고 일어섰다. 몹시 아픈 표정이 얼굴에 나타났지만 방문을 열고 나서면 편한 구두를 신은 것처럼 꼿꼿하게 걸었다.
 
 陸여사의 고충 가운데는 식사문제도 있었다. 공식 오찬이나 만찬에선 으레 그 나라 특유의 별미나 성찬이 나오지만 음식맛을 볼 심리적 여유까지는 제공되지 않았다. 채식을 즐기던 陸여사는 동남아 3국의 기름진 육류에 구 미가 당기질 않아 먹는 시늉만 할 뿐이었다. 식사를 제대로 못한 채 숙소로 돌아오면 다음 일정에 맞추기 위해 의상과 머리 손질부터 먼저 해야 했으 므로 과일 한 개도 먹을 여유가 없었다. 보다 못한 수행비서가 밖에서 냄비 하나를 구해 와 호텔 방에서 라면을 끓여 드렸다. 단무지 몇 쪽을 두고 라 면을 맛있게 먹은 陸여사는 이마에 송글송글 맺힌 땀을 닦으면서 『아, 이 제 살 것만 같아. 어디, 또 가봐야지』라며 자리에서 가뿐히 일어서 나갔다. 수행원들은 조금 전에 벌어진 성대한 잔치에서 국왕이나 왕비를 상대로 상 냥하게 담소를 나누던 의연한 陸여사가 이마에 땀방울이 맺히도록 라면을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고 눈물겨워했다.
 
 하루는 陸英修가 수행원이 끓여준 라면에 손도 대지 않고 횅하니 나가더란 것이다. 그리고 잠시 후 朴대통령과 함께 나타나 두 사람이 라면을 맛있게 들었다. 이때부터 수행원들은 라면 2인분을 끓이게 된다.
 
 외국에서 朴대통령 부부가 나눠먹던 라면은 1963년 9월 三養食品(삼양식품 )에 의해 처음 등장했다. 1966년 무렵엔 개발시대의 서민대중에게 요긴한 대체식량으로 확산되던 시기였다. 이해 가을 三養食品의 全仲潤(전중윤) 사 장은 저녁 늦게 청와대에서 걸려 온 전화를 받았다. 수화기를 들어보니 朴 대통령이 『夜食(야식)으로 라면을 먹다가 전화를 걸었다』면서 『정부의 粉食장려정책에 협조해주어 고맙다』고 치하를 한 뒤 『거, 全사장. 라면에 아무래도 고춧가루를 좀 넣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한국 사람은 아무래도 국물이 얼큰해야 하니까요』라고 말했다.
 
 어릴 때부터 결벽증이 있었던 陸英修는 외국을 방문할 때면 수행원들에게
 
 『아무리 작은 실수일지라도 범해서는 안되고, 아무리 사소한 허물이라도 잡혀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호텔에서 출발할 때면 陸英修는 자신의 방 뿐만 아니라 수행원의 방까지 점검하여 들어올 때와 똑같은 상태로 해두려 했다. 비서들이 침구를 손질해 두면 陸英修는 꼼꼼히 살펴보다가 『아냐, 그렇게 안 돼 있었어요』라며 고쳐놓곤 했다. 이런 정리 정돈 습관은 朴대 통령도 마찬가지였다. 陸英修는 현지에서 갈아입을 의상에 소용되는 색실과 바늘, 옷핀 등을 손바닥만한 상자 속에 넣고 다니다 준비를 못한 수행원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1966년 2월13일 오전 10시, 朴대통령 일행은 태국 돈무앙 공항에 도착해 離泰(이태) 성명을 낭독했다. 朴대통령은 21발의 예포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의장대를 사열한 뒤 일행과 함께 특별기에 올라 비공식 방문국인 홍콩으로 출발했다. 홍콩 방문은 臺灣(대만) 정부와 일정을 맞추기 위해 부득이 취 해진 조치였다.
 
 방콕에서 홍콩으로 비행하는 도중 朴대통령 부부와 일행이 탄 특별기는 월 남의 퀴논 상공을 통과했다. 朴대통령은 창 밖을 통해 정글로 뒤덮인 육지 를 내려다보다가 『우리 장병들이 있는 곳인데 내가 들르지 못하다니 참… 』하며 혀를 찼다. 한국 정부측이 방문의사를 타진했으나 월남 정부측은 국 내 정세와 의전문제를 들며 난감함을 표시해 월남을 방문할 수 없었다. 朴대통령 일행이 홍콩에 도착한 것은 오전 11시. 홍콩 총독 데이비드 트렌 치卿(경)이 마중나와 국가원수로서의 예우를 갖춰 환영했다. 중국과 연접한 탓으로 2백여명의 정·사복 경관들이 공항을 엄중 경비하고 있었다. 공항 에는 2백여명의 교포와 때마침 촬영차 와 있던 申相玉(신상옥) 감독, 崔銀姬(최은희), 金勝鎬(김승호), 韓銀珍(한은진) 등 영화인들도 나와 눈길을 끌었다. 朴대통령은 다음날 아침 교민들과의 조찬석상에 이들을 초청했다. 이날 공항에 미리 와 대기하고 있던 蔡命新 주월 한국군 사령관에게 朴대 통령은 1백여 개의 전기 면도기를 전달하면서 『참호 속에서 싸우는 장병에 게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트렌치卿은 朴대통령 부부를 안내하며 숙소인 만다린 호텔까지 同乘(동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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