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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正熙와 蔣介石
 朴正熙와 蔣介石
 
 1966년 2월13일 정오 무렵 朴대통령 부부는 만다린 호텔에 여장을 푼 뒤 공 식 일정 없이 이틀간을 보냈다. 朴대통령은 호텔에서 공관장 회의를 주재하 고 申尙澈(신상철) 주월대사, 柳陽洙(유양수) 주필리핀 대사, 洪聖郁(홍성 욱) 주캄보디아 총영사, 蔡命新 주월 한국군 사령관으로부터 보고를 받고 월남사태를 중심으로 한 동남아 정세를 검토했다.
 朴대통령은 공관장 회의에서 이번 여행의 결과를 설명하면서 아시아지역 지 도자회의 개최문제에 대해 주재국의 협조를 얻을 것과 경제외교 강화 방안 들을 지시했다. 회의가 끝난 뒤 朴대통령은 별도로 蔡命新 사령관과 자리를 함께하고 약 두 시간 동안 월남사태를 검토하기도 했다.
 
 2월14일 오전, 朴대통령 부부는 만다린 호텔로 교포 대표 30여명과 申相玉 감독 등 영화인 10여명을 초청해 조찬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朴대통령은 『국내에서 우리는 인구가 많다고 늘 부담을 느껴 왔는데, 이렇게 해외에 나와 보니 그 많은 인구가 우리의 재산입디다』라고 했다. 2월15일 오전 10시, 朴대통령 일행은 홍콩 카이탁 공항을 출발해 약 한 시 간 뒤 中華民國(중화민국) 상공에 들어섰다. 自由中國(자유중국) 또는 國府 (국민정부의 준말)로 호칭되던 臺灣 정부의 정식 國名(국명)은 中華民國이 지만 현실적 영역의 속성을 나타내는 臺灣으로 불리곤 했다. 오전 11시, 마중나온 中華民國 공군기 편대가 호위하는 가운데 朴대통령의 특별기는 松山(송산) 군용비행장에 도착했다. 섭씨 22도의 청명한 날씨. 朴正熙 대통령은 蔣介石 총통과 만감어린 악수를 나누었다. 49세의 朴正熙 와 79세의 蔣介石은 생애의 여러 지점에서 교차했다.
 
 가난한 소작농의 막내로 태어난 朴正熙처럼 蔣介石은 1887년 10월31일 중국 浙江省(절강성)의 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그는 1906년 일본 육군사관학교 의 전신인 東京(동경) 무관학교에 입교해 1910년 일본군 소위로 다카다(高田) 野砲聯隊(야포연대)에서 근무, 朴正熙와 같은 포병장교 출신이기도 하 다. 蔣介石이 朴正熙와 다른 점이라면 武官(무관)학교 시절에 중화민국의 창시자이자 혁명전략가인 孫文(손문)을 스승으로 만난 뒤 淸朝(청조)타도, 三民主義(삼민주의·民族, 民權, 民生主義)를 내건 孫文 정신의 뒤를 잇는 삶을 살았다는 점일 것이다.
 
 蔣介石은 1911년 軍을 무단이탈해 上海(상해)로 귀국한 뒤 1백명의 결사대 를 조직해 杭州(항주)로 진격, 淸軍(청군)과의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 다. 孫文이 본토에서 민족주의 기치를 내걸고 창설한 國民黨(국민당)은 19 25년 3월12일 그의 사망을 계기로 蔣介石에게 지휘권이 넘어갔다. 그는 이 해 4월 南京(남경)국민정부를 수립하고 12월에는 浙江省의 財閥(재벌)인 宋 씨 가문의 셋째 딸 宋美齡(송미령)과 결혼했다. 朴正熙가 충청도 巨富(거부 ) 陸鍾寬(육종관)의 딸 陸英修와 결혼한 것과도 비교되는 대목이다. 蔣介石은 1937년 日本軍(일본군)의 침략에 맞서 중국 공산당과 공동전선을 편 國共(국공)합작을 주도, 日本軍을 저지하는 데 주력했다. 이 기간중 朴正熙는 만주군관학교와 일본 육사를 거쳐 만주군 장교로 근무함으로써 蔣介石과는 대치했다. 1945년 8월15일 일본의 패망으로 두 사람은 다시 접근하 기 시작한다. 朴正熙는 초췌한 몰골로 蔣介石 휘하의 광복군을 찾아 신변의 안전을 도모한 뒤 귀국했다. 한편, 國共合作으로 일본과 대항하던 蔣介石 의 國民黨은 毛澤東(모택동)을 중심으로 한 중국 共産黨에게 본토를 넘겨준 채 1949년 12월7일 臺灣으로 자리를 옮겨야 했다.
 
 공항에서 악수를 나누던 朴·蔣 두 원수는 한동안 말을 잊은 듯 붙잡은 손 을 놓지 못했다. 당시 외무장관으로 수행했던 李東元(현 국민회의 고문)은 『朴대통령이 생전에 가장 신세를 많이 지고 좋아했던 사람은 존슨 美대통 령이었고, 마음속으로 가장 존경했던 사람은 蔣介石 총통이었을 것』이라고 했다.
 
 공항에서 蔣총통은 환영사를 통해 『韓·中 양국은 공산주의와의 투쟁에서 선봉적인 역할을 하고 있으며 繁榮盛衰(번영성쇠)의 공동운명체』라고 했 다. 朴대통령은 『중국의 본토 수복과 우리나라의 국토통일이야말로 兩(양 ) 국민의 염원』이라고 말한 뒤 『비록 오늘, 아시아의 일부가 공산주의에 물들고 있다 하더라도 이는 극히 暫定的(잠정적)임에 불과한 것이지 전통 적 아시아의 倫理(윤리)와 의지는 언젠가 이를 구축하고 통일된 중국, 통일 된 한국을 되찾고야 말 것』이라고 했다.
 
 공항에서의 환영식이 끝난 뒤 兩(양) 원수는 자동차에 동승해 숙소인 臺北 市內(대북 시내)의 그랜드 호텔로 향했다. 연도는 20만 이상으로 추정되는 인파로 가득했고 태극기와 靑天白日旗(청천백일기)가 펄럭였다. 臺北市의 그랜드 호텔은 일제가 臺灣을 통치할 당시 神宮(신궁)으로 사용했 던 곳으로 臺北 시가지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이날 자유중국 정부측은 朴대통령의 자유중국 방문을 기념하는 우표를 발행 하는가 하면 이 날짜 우편물에는 한·중 양국 국기와 「韓國大統領 訪問紀念」이라는 消印(소인)을 찍었다. 자유중국 정부는 육·해·공군의 영관급 장교 세 명을 朴대통령의 연락장교로 파견하고 駐韓 중국대사관 무관 출신 의 杜慶(두경) 대령을 의전수석부관으로 임명했으며 陸英修 여사의 수행비 서로는 자유중국 의전실장의 부인인 夏(하)여사를 배치했다. 자유중국은 국제연합(UN)에서 영국,미국, 프랑스, 소련의 4强과 함께 상임 이사국의 자격으로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지만 1966년 현재 자유중국을 승인하고 있던 국가는 57개국에 불과했다. 1964년 6월로 중단 된 15년간의 미국 원조자금으로 성장하기 시작한 臺灣 경제는 1961년부터 시작된 제3차 경제개발계획에 힘입어 1963년 하반기부터 국제수지면에서 흑 자를 나타내기 시작, 1965년 현재 1인당 국민소득이 1백68달러에 달해 한국 (약 1백 달러)보다 한 발 앞서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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