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소국 대통령의 悲哀
울산 제3비료(영남화학)에 出資하기로 한 스위프트社는 먼저 15년간의 경영권을 내놓 으라고 요구했다. 우리측도 50% 출자를 했 고 비료원료인 인광석, 유황, 염화칼리를 스위프트측으로부터만 사주기로 했는데도 이런 요구를 한 것이다. 市場도 뺏고 회사 도 가져가겠다는 말과 같았다. 韓美 양쪽은 격론 끝에 직접 투자액(자본출자금)의 15 0%를 회수할 때까지만 스위프트측에 경영권 을 주고 그 후는 공동경영하기로 타협했다. 스위프트社는 또 제품이 나오면 全量(전량)을 한국 정부에서 사주고 그 代金은 즉각 지불해줄 것을 요구했다. 이것은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 회사는 또 투자분에 대 한 이익보장을 요구했다. 그들의 打算(타산)은 투자한 돈에 대해서 매년 20%씩 이익을 거두어 5년 만에 원금을 회수한다는 것이 었다.
이 조건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비료값을 매 길 때의 公式을 제시했다. 즉, 생산비가 얼 마 들든 간에 판매가격은 「미국과 일본의 국내 비료판매가격 평균에다가 수송비를 加算한 가격」으로 정할 것을 요구했다. 비 료는 어느 나라나 수출가격이 국내가격보다 싸다. 그런데 미국측은 비싼 국내가격을 算定 기준으로 삼은 데다가 미국에서 비료 를 사오는 것으로 가정하여 수송비까지 덧 붙이더라는 것이었다. 비료를 수입하는 것 보다 비쌀 것이 뻔했다.
우리 정부는 약간 수정하여 이 요구도 수용 했다. 경제기획원은 협상과정에서 이상한 조건을 붙였다. 제3비료가 연간 20% 이상, 즉 연간 400만 달러 이상의 수익을 올릴 경우, 그 잉여이익의 10%를 정부에 내어놓 고 나머지는 스위프트社와 한국측 합작회사 (충주비료공장, 나중엔 한국종합화학회사) 가 갈라먹기로 한 것이다.
제4비료 공장에 투자하기로 한 걸프社는 그 래도 油公에 합작투자를 하고 있었던 관계 로 해서 스위프트社처럼 지독한 이익보장을 요구하지는 않았다. 걸프社가 제시한 조건 은 제3비료보다는 우호적이었다. 걸프측은 또 연간 400만 달러 이상의 이익이 나면 20%를 정부에 내겠다고 했다. 건설 주무부서인 상공부의 吳源哲 공업1국 장은 『미국측의 요구조건이 해도 너무 한 다는 생각이 들고 우리를 깔보는 것에 분통 이 터졌다』고 한다. 그는 농림부와 손잡고 경제기획원을 상대로 문제를 제기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朴대통령을 모시고 경제기 획원 회의실에서 대책회의를 열었다. 「왕초」란 별명을 가진 張基榮 부총리는 吳源哲의 문제제기에 대해선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농림부 쪽에서 한국측에 불리한 합작조건에 대해서 보고를 하자 신경질을 냈다.
『여보 金과장, 답변하시오. 비료값이 좀 비싼 것이 낫소, 아니면 비료가 없는 것이 낫소』
『金과장, 답변하시오. 비료공장 안 지어도 좋아요?』
이렇게 다그치자 농림부에서 나온 사람은 얼었다.
『그래도 비료공장은 필요합니다』
『그럼 됐소』
이렇게 결론을 내린 張基榮은 朴대통령에게 『각하, 조건은 좀 불리합니다. 그런데 代案이 없습니다』라고 했다. 朴正熙는 무섭 게 吳源哲을 노려보았다. 吳국장도 視線을 피하지 않았다. 대통령의 눈은 분노로 차 있었다. 吳국장은 처음에는 기합인 줄 알 았다. 대통령의 눈에서는 분노와 함께 悲哀 (비애) 같은 것이 느껴졌다. 한 2분의 침묵 . 朴대통령이 입을 뗐다.
『그 안을 시행하시오』吳源哲은 『나는 지금도 나를 무섭게 노려 보던 그때 그 사령관의 눈동자를 잊을 수 없다. 평생 못 잊을 것이다. 약소국 대통령 의 슬픈 표정을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고 회고했다.
울산에 지은 제3비료 공장의 건설비는 364 7만 달러, 진해에 지은 제4비료 공장은 35 93만5000달러로 확정했다. 제3, 4비료 공장 은 가동하자마자 엄청난 이익을 냈다. 효율 적인 공장운영 덕분이기도 했고 투자회사측 에 일방적으로 유리한 계약조건 때문이기도 했다. 걸프가 투자한 제4비료, 즉 진해화 학의 경우 1968년의 순이익은 596만 달러, 이듬해엔 780만 달러, 1973년엔 1218만50 00달러의 순이익을 냈다. 2000만 달러의 자 본금으로 이렇게 많은 이익을 내니 언론과 야당으로부터 비난이 쏟아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