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식 경영법과 한국식 관행의 충돌
미국 회사 스위프트社가 경영권을 쥐게 된 울산의 제3비료 공장, 즉 영남화학의 경우 , 미국식 경영이 무엇인가를 한국측에 가르 쳐주는 계기도 되었다. 공군참모총장 출신 인 金昌圭(김창규) 사장은 實權이 없었다. 미국인 부사장 호프웰은 철두철미 냉정한 미국식 경영자였다. 미국 투자회사를 위하 여 자신의 명예를 걸고 한치의 양보도 없었 다고 한다(吳源哲 지음-「한국형 경제건설 」 제1권-「엔지니어링 어프로치」에서 인용). 사무실 배치부터 달랐다. 다른 회사는 부장 부터 방을 따로 썼다. 여기선 理事室(이사 실)도 방문을 없애고 벽으로 차단한 정도였 다. 부사장도 아예 자신의 문을 열어놓았다 . 金사장도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손님이 와서 차를 한 잔 마시더라도 私생활 (프라이버시)은 있을 수 없었다. 노크도 필 요없게 만들었으니 언제 누가 들여다보고 들어올지 모르게 만들어 私的인 한담은 할 수도 없었다.
미국 경영층은 표준원가 제도를 우리나라에 서 처음으로 도입했다. 전기값, 물값, 원료 값, 부대비값의 표준을 정해놓고 매달 따지 고 들었다. 자연스럽게 절약운동이 시작되 었다. 水災(수재)가 났을 때 회사 이름으로 기부를 하자고 해도 미국인에겐 통하지 않 았다. 그것은 회사가 아니고 정부가 할 일 이라고 못박았다. 부득이 事前(사전)에 지 출한 것도 검토해서 事理(사리)에 맞지 않 으면 개인 변상을 시켰다. 공무원을 접대한 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정치자 금은 어림없는 이야기였다. 이렇게 원가를 절감하고 합리적인 경영을 한 덕분에 제3비료(영남화학)는 제4비료(진 해화학)보다도 1969년엔 17%, 다음해엔 20 %나 이익이 더 났다. 이렇게 되니 진해화학 에 비상이 걸렸다. 진해화학도 경영합리화 를 위해 애쓴 결과 이익차가 줄어들었다. 경쟁이 가져온 결과였다.
영남화학의 이런 미국식 경영법이 좀더 오 래 계속되었더라면 한국의 기업풍토를 개선 하는 데 모범이 되었을 것이라고 아쉬워하 는 사람들도 있다. 1971년 호프웰 부사장이 돌아가고 플래트란 사람이 후임으로 온 뒤 에는 경영방식이 다시 한국식으로 변했다는 것이다. 그는 親韓的인 인사였고 한국 여 인과 결혼할 정도였다.
이성적인 미국식 경영법과 감성적인 한국식 이 충돌한 사건이 1968년 추석 때 영남화학 에서 일어났다. 호프웰 부사장은 종업원을 모집할 때 한 사람, 한 사람을 불러 과거 근무하던 회사에서 받은 봉급을 물어보았 다. 본봉 외에도 보너스, 추석 떡값, 가족 수당 등 10여 개의 항목이 나오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는 이렇게 복잡한 임금체계는 곤란하다면 서 총액을 계산해내고 거기에 일정액수를 더하여 본인의 同意(동의)를 받은 후 年俸制(연봉제)로 계약했다. 그리고는 연봉총액 의 12분의 1을 월급으로 지급하게 되었다. 한국인측에선 연봉의 18분의 1씩만 월급으 로 주고 18분의 6은 떼어놓았다가 때에 맞 추어 보너스나 명절 떡값으로 주자고 했다 . 합리적인 호프웰 부사장은 종업원의 월급 을 利子(이자)도 붙여주지 않고 보관했다가 나중에 주는 것은 종업원의 이익에 反하는 것이라면서 반대했다. 이론적으로는 맞는 말이다. 호프웰 부사장은 종업원을 위한다 면서 보너스 제도를 없애버렸다. 그런데 종 업원들은 다른 회사는 추석 보너스를 받고 있으니 우리도 달라면서 파업을 하고 말았 다. 吳源哲은 이렇게 썼다.
<호프웰씨는 한국인은 도저히 이해하기 어 려운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金昌圭 사장은 그를 호프레스(Hopeless)라고 불 렀지만 물론 호프웰씨는 한국인의 가치관에 대해서 호프웰(Hopewell)이라고 생각하지 는 않았을 것이다>
제3, 제4비료공장 건설의 상공부측 실무책 임자였던 吳源哲 당시 공업1국장은 제5비료 공장, 즉 한국비료 건설이 朴대통령과 張基榮 부총리의 强勸(강권)에 의하여 시작되었 다는 李秉喆의 주장에 의문을 제기한다. 張基榮이 경제기획원 장관으로 부임한 것은 1964년 5월10일. 한국비료공장의 사업승인 안건이 국무회의에서 가결된 날짜는 4일 후인 5월14일. 바로 다음날 한국비료 건설 계획이 외자도입 촉진위원회에서 전격적으 로 통과되었다. 李秉喆의 자서전에 쓰인 대 로 이 4일 사이에 과연 「張基榮이 여러 번 나를 찾아와서 간청하고」 그 자신은 마지 못해 응낙하여 서류를 작성한 뒤 그 안건이 국무회의를 통과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 이 든다는 것이다.
제2의 의문은 제1차 5개년 계획에도 들어 있지 않은 대규모 공장건설이란 점이다. 1 970년까지의 비료수요를 기준으로 하여 제 3, 4비료를 짓기로 하고 기본계약을 체결하 기도 전에 요소 비료 33만t 규모의 세계 최 대공장을 또 짓기로 한 것은 정상이 아니란 지적이다. 한국의 요소비료 생산량은 4개 기존 비료공장이 가동할 때를 기준하면 총 33만8000t이 된다. 한국비료가 생기면 요소 비료 생산량이 倍(배)가 된다. 국내시장이 포화상태가 되면 어떻게 할 것인가. 삼성 은 「남으면 수출한다」는 조건을 붙였다. 제3의 의문은 절차의 무시. 한비건설 案件 은 국무회의를 통과한 뒤에 경제기획원의 승인을 받았다. 비료공업을 책임지고 있던 상공부와 비료수급을 책임지는 농림부는 바지저고리가 되었다. 『나는 누가 주동을 했는가 지금도 의문을 갖는다. 여하간 삼 성의 비료공장에 대한 강한 집착과 그 치밀 한 밀실계획을 짐작할 뿐이다』라고 吳源哲 은 회고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