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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炯旭의 모함
 金炯旭의 모함
 
 며칠 뒤 李萬燮 의원은 朴대통령으로부터 저녁식사 초대를 받아 청와대로 들어갔다. 丁一權 국무총리, 張基榮 부총리, 嚴敏永 내무장관, 李厚洛 비서실장, 金炯旭 정보 부장도 와 있었다. 식사 도중 반주가 몇 순 배씩 돌자 金炯旭 정보부장이 대통령에게 이렇게 말하더란 것이다.
 
 『각하, 이번에 金斗漢이 오물을 뿌린 것은 金鍾泌이가 시켜서 한 짓이 틀림없습니다』
 
 『그럴 리가 있나? 金부장이 잘못 알았겠지』
 
 『틀림없습니다. 사카린 밀수사건을 처음 보도한 것이 경향신문인데 그것은 JP계열인 金龍泰(김용태) 의원이 정보를 흘려 주었 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金斗漢이 구속되어 형무소에 갈 때도 JP라인인 金澤壽(김택수 )가 5만원짜리 수표를 건네주었습니다. 연 설 내용을 보아도 李厚洛 실장과 張基榮 부 총리는 공격하면서도 金鍾泌은 동정하는 투 였습니다』
 
 옆에 있던 다른 사람들도 金부장의 이야기 를 거들면서 사건 배후 인물로 金鍾泌을 지 목했다고 한다. 朴대통령도 金炯旭 부장의 말을 믿기 시작하더라고 한다.
 
 『金부장, 그러면 金斗漢이를 끝까지 다그 쳐서 자백을 받아 내』
 
 앉아 있던 李萬燮 의원은 「이것 큰일 났구 나. 대통령 주위에 이런 사람들이 둘러싸고 있으면 결국 대통령도 오판하게 마련이구 나」 하는 생각이 들더란 것이다. 저녁 식사 후 한 사람씩 대통령과 악수를 하고 헤어질 때 李萬燮 의원은 일부러 맨 마지막까지 남아 朴대통령과 서재에서 獨對 했다.
 
 
 『각하, 저는 JP라인도 아니고 공화당에 입 당한 것도 대통령 한 분을 믿고 들어왔습니 다. 오늘 나온 이야기는 사실과 전혀 다릅 니다. 경향신문에 기사가 난 것은 JP계열에 서 흘려준 것이 아니고 울산 지국을 통해 취재해서 보도한 기사입니다. 金澤壽 의원 이 金斗漢 의원에게 돈을 준 것도 같은 건 설위원회에 속해 있던 金의원에게 私食이라 도 사 먹으라고 인간적으로 준 돈입니다. 그리고 金斗漢 의원이 남에게 사주를 받아 연설할 사람도 결코 아닙니다』朴대통령은 묵묵부답이 되어 심각한 표정만 짓고 있었다.
 
 
 『각하, 제 말씀이 진실입니다. 몇 사람이 짜고 각하께 거짓말하는 것을 그대로 볼 수 없어 이렇게 감히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알았소』
 
 李萬燮 의원이 보기에는 朴대통령도 자신의 이야기를 믿는 것 같았으나 金炯旭 부장에 게 한번 지시한 것을 번복하고 싶지는 않은 것 같았다고 한다(李萬燮 회고록 「證言臺」에서). 얼마 뒤 李萬燮 의원이 식당에서 우연히 金斗漢을 만났더니 혹독한 수사를 받은 때문 에 건장하던 사람이 몰골은 초췌해지고 말 도 제대로 못할 정도가 되어 있더라고 한다. 이 무렵 金鍾泌 공화당 의장은 미국 웨스터 민스터 대학을 방문, 명예 박사학위를 받 은 뒤 귀국하는 도중에 越南을 방문하고 있 었다. 1986년 月刊朝鮮 11월호에서 金鍾泌 은 이렇게 증언했다.
 
 
 『월남에서 국내 소식을 들어 보니 그 야단 이 났더구먼. 내가 돌아온 뒤 나중에 金斗漢 의원이 나한테 얘기를 해요. 그런 음모 가 있더라구. 그런 식으로 진술하라고 강요 까지 하고 그랬는데 뭐 이런 사람이 다 있 느냐구 그래요. 그래 내가 세상에 할 일이 없어서 그런 짓을 했겠어요. 그때 조사했 던 검사도 세상 떴지만, 속으로 나한테 퍽 미안해 하면서 갔을 거요』韓肥 사카린 밀수사건은 李秉喆의 차남 李昌熙(이창희)가 구속되고 한국비료공장 주 식의 51%를 정부에 헌납한다는 약속을 함으 로써 일단락지어졌다. 韓肥주식 헌납문제와 관련해 李萬燮이 朴대통령으로부터 직접 들은 이야기가 있다.
 
 張基榮 부총리가 처음 李秉喆의 주식 헌납 결재서류를 들고 청와대로 들어왔을 때에 는 韓肥 전체 주식의 51%가 아닌 李秉喆 개 인 소유의 주식 중 51%만 헌납한다는 내용 이었다고 한다. 朴대통령은 『이건 약속위 반 아닌가. 나를 속이려는 거야!』하고 노 발대발했다고 한다. 韓肥 주식의 51%는 19 67년 10월4일 정부에 헌납되었고 삼성은 4 9%의 주주로만 남아 있게 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1967년부터 가동하기 시작한 한국비료는 요소비료를 값싸게 생산하는 우수한 공장이 되었다. 1967년의 t당 생산 원가는 65달러. 외국의 95달러보다 30%나 싼 가격으로 국내에 공급할 수 있게 되어 1968년부터 본격화되는 農工竝進정책의 든 든한 발판이 되어준다. 1967년 한국비료는 t당 81달러로 수출도 해 1백64만 달러를 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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