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의 애착
1963년 9월 鄭宇眞은 朴正熙 국가 재건 최 고회의 의장에게 건의서를 냈다. 그는 「중 동을 비롯한 지구상의 수다한 국가가 천혜 의 석유자원을 바탕으로 경제를 부흥시켜 나가고 있으나 우리나라만 産油(산유) 불가 능이란 정설 아닌 정설에 얽매어 있다」고 지적한 뒤 「그러나 영일, 포항 지구는 일 련의 과학적인 탐사에 의하여 지질 구조상 석유가 나올 가능성이 입증되었으니 하루 빨리 정부에서 이 지역을 집중개발, 산유의 꿈을 이루도록 조치해 줄 것」을 건의했다. 朴正熙 의장은 상공부에 『건의인과 함께 현장을 공동으로 조사하고 1964년도 예산에 서 자금을 확보, 우선 국내 장비로라도 시 추작업을 펴도록 하라』는 구두지시를 내렸다. 이해 9월에 영일 유전개발 추진위원회가 구 성됐다. 초대 위원 중에는 대구의 목재상 이상옥, 서울 목재상 정양세, 은행원 손대 식, 부산 상인 서진택 등과 예비역 준장 이 정순 등이 가담했다. 추진위원회가 모은 돈 은 2천여 만원. 鄭宇眞의 세 동생과 형 鄭長出도 시추 현장에서 현장관리 기획 기술 등을 맡아 함께 뛰었다. 석유시추용 굴착 장치를 국내에서 구할 수 없었던 이들은 1 910년 이전에나 미국에서 사용했던 일반 광 산용 충격식 굴착기를 구해와 1964년 3월1 2일 포항시 의창읍 초곡동에 201호라 명명 한 구멍을 뚫기 시작했다. 이해 6월에 지하 85m까지 파 들어가던 도중에 미량의 천연 가스가 분출되었다는 보도가 있었다. 상공부에서는 지질 조사소의 연구원과 워싱 턴 대학의 샤론 박사를 포함한 일곱명의 전 문가를 보내 조사를 시켰다. 이들은 천연가 스가 분출되었는지 확인할 수 없다는 결과 를 보고했다. 이에 따라 상공부는 「鑛主( 광주)측이 말하는 천연가스 분출 사실은 조 작이다」는 발표를 했다. 鄭宇眞은 명예를 크게 손상당했고 영일 유전개발 추진위원 회는 해체되었다. 대신 鄭宇眞의 다섯 형제 를 중심으로 영일 유전 개발 본부를 발족시켰다. 지질 조사소는 1964년 8월3일부터 9월21일 까지 포항일대에서 처음으로 지진파 탐사를 했다. 그 결과 포항 근처의 지질 구조를 대체로 파악하여 석유탐사에 상당한 정보를 갖게 되었다. 지질 조사소는 포항 퇴적분 지가 10도쯤 동쪽으로 기울어져 영일만으로 들어갔으며 석유를 모으는데 불리한 單斜 구조라고 보았다. 소규모 단층들로 인해 석 유 집적 구조는 발달해 있지 않으며 오히려 바다 쪽으로 갈수록 퇴적층이 두꺼워져 석 유를 발견할 확률이 해저에 더 높다는 결론 을 내렸다.
201호 시추로 돈이 바닥난 鄭宇眞은 1965년 1월에 朴正熙 대통령에게 장비를 지원해 달라는 진정서를 냈다. 金正濂 상공부 차관 은 朴대통령으로부터 친필 메모가 첨부된 鄭씨의 진정서를 받았다. 진정서 한 모퉁이 에 부착된 메모지에는 「되는 방향으로 노 력할 것」이라고 쓰여 있었다. 金正濂 차관은 상공부 산하의 국립지질 조 사소가 사용하던 시추능력 1천m짜리 고체 광물 시추기를 지원하도록 지시했다. 1965 년 1월18일 鄭宇眞은 지질조사소의 기술지 도에 따라 이 시추기로 포항시내에서 301호 갱정을 시추했다. 시추는 순조로웠다. 심 도 56.2m에서 천연가스가 나왔다. 우리나라 석유탐사에서 처음으로 분출한 천연가스였 다. 242m, 390m, 406m에서도 천연가스가 분 출했다. 성냥불을 그어대자 1m 높이의 불꽃 이 분출했다. 시추 관계자들은 대한민국 만 세를 외치곤 했다. 가스를 분석한 결과 석 유와 무관한 메탄가스였고 경제성도 없다는 결과가 나왔다.
301孔의 시추기는 지하 625m에서 화산암과 만났다. 신생대 3기 지층에서만 석유가 존 재할 뿐 中生代 지층에서는 석유가 존재하 지 않는다고 판단하고 있던 지질 조사소측 은 시추를 중단했다. 鄭宇眞은 화산암 밑에 다시 신생대 3기 지층이 있을 수 있다며 이에 반발했다. 1965년 6월19일 지질 조사 소측은 이미 鄭宇眞이 시추한 의창읍 초곡 동 201호 갱정 자리에서 다시 201호 B 갱정 의 시추를 시작했다. 110m에서 화산암반이 나타났다. 鄭씨의 격렬한 주장에 밀린 지 질 조사소측은 시추를 계속하여 지하 400m 에서 퇴적암층과 마주쳤다. 鄭씨는 신생대 3기 퇴적층이라고 했지만, 지질 조사소측 은 中生代 퇴적암이니 원유 부존 가능성은 없다며 시추를 끝냈다.
고물 시추기, 양측의 불협화음, 자금 부족 등의 이유로 포항의 시추작업이 막바지에 이를 즈음이던 1966년 5월25일 朴正熙 대 통령은 金允基(김윤기) 무임소 장관을 단장 으로 한 특별 조사단을 현지에 파견시켜 공 정한 처지에서 유전의 가능성을 평가하도록 특명을 내렸다. 그 전부터 상공부측 조사 단의 보고서를 숱하게 접해 온 朴대통령이 한 非전문가의 주장에 끝내 기대를 저버리 지 않았던 이유는 貧國 탈출의 보증수표인 産油國을 향한 꿈과 석유 지질학에 대한 無知가 불과 기름처럼 만나 활활 타올랐기 때문이었다.
朴대통령은 이무렵 청와대 제2부속실에 근 무하던 처조카 洪晶子(홍정자)와 식사하는 자리에서 이런 말을 했다.
『우리나라에도 석유가 나올 확률이 있다는 데… 그렇게 되면 내가 한 시름 놓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