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값싼 석유시대의 최대 受惠者
 값싼 석유시대의 최대 受惠者
 
 1960년대 초 국제원유값은 배럴당 2달러 전 후였다. 1배럴은 1백59ℓ. 1964년 울산정유 공장이 가동되기 시작한 시기 한국의 물가 와 대비하면 원유 1배럴은 대략 쇠고기 세 근, 고무신 다섯 켤레, 담배 열다섯 갑, 쌀 한 말, 달걀 백 개, 무우 열貫 가운데 하나의 가격과 맞먹었다. 1950~60년대 리비 아, 나이지리아, 北海, 알래스카 등지에서 巨大유전이 잇따라 발견되었다. 원유가 공 급과잉에 빠지면서 20년간 기름값이 안정되 었다. 한국으로선 다행인 것이 이 시기에 석유를 주된 動力源으로 하는 근대화를 시 작함으로써 값싼 기름의 덕을 크게 보았다 는 점이다. 우리가 근대화를 10년 늦게 했 으면 막차를 놓쳐 영원히 선진국 진입이 불 가능한 나라가 되었을 것이다. 1970년대에 불어닥친 두 차례의 오일 쇼크
 ─1973년의 제1차 오일쇼크는 오일 머니가 몰려든 중동건설시장에 진출함으로써 정면 돌파에 성공했다. 1979년 이란 혁명에 이은 제2의 오일쇼크는 중화학공업에 과잉투자 한 朴正熙 정부의 경제 기틀을 흔들면서 물 가고와 민주화 요구가 결합되는 경제·정치 위기로 발전했고 그 회오리바람 속에서 10 ·26 사건이 발생했던 것이다. 고도의 정치 적인 물질인 석유와 朴正熙의 운명은 평행 하거나 交叉하는 궤적을 그렸다. 값싼 석유는 인류의 생활양식에 혁명적인 변화를 몰고 왔다. 각종 석유제품이 쏟아져 나와 衣食住를 윤택하게 했다. 값싼 기름 값은 다른 물건값도 끌어내리거나 생산을 촉진하는 연쇄반응을 일으켰다. 예컨대 석 유화학에 기초한 합성섬유가 대량으로 소비 되기 시작하자 면화 및 양모를 재료로 하는 천연섬유의 소비량이 줄었다. 면화값이 폭락하자 농부들은 면화 대신 콩 이나 밀을 경작하기 시작하면서 식량공급이 늘어났다. 양모값이 떨어지자 양 대신 소 를 키우는 농민들이 늘어났다. 그 여파로 쇠고기와 버터가 공급과잉에 빠지고 값이 떨어지게 되었다. 肉類소비의 증가로 많은 인류의 건강이 향상되었다. 석유화학에 기 초한 비료와 농약이 값싸게 공급되면서 단 위당 곡물수확고가 늘어났다. 석탄 대신 값싼 重油를 쓰는 석유발전소가 생기면서 전력요금도 떨어졌다. 값싼 전력 과 電氣器機가 널리 보급되자 제련과정에서 전력을 많이 쓰는 알루미늄의 공급이 늘어 났다. 알루미늄이 우리 생활 속에서 확산되 기 시작했다. 창틀, 건축자재, 통조림 깡통 , 송전선으로 알루미늄이 많이 쓰이면서 구 리와 주석이 밀려나기 시작했다. 1950~60년대에 근대화를 시작한 나라들은 이 값싼 기름의 덕을 보았다. 고도성장에도 불구하고 값싼 기름이 다른 상품값을 연쇄 적으로 끌어내렸기 때문에 물가고를 피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시대는 또한 中東산 유국과 같은 자원국가들이 공업국을 위해 희생된 年代이기도 했다. 일본은 풍부한 인 력과 값싼 자원을 결합시킨 가공산업을 육 성함으로써 이 年代의 가장 큰 수혜자가 되 었다. 한국도 값싼 자원을 수입하여 넘치는 고급인력을 투입함으로써 부가가치가 높은 수출품을 만들어내는 전략을 채택하여 시 대의 흐름을 타게 되었던 것이다. 고도의 戰略물자인 기름의 중요성을 실감있 게 體得한 사람이 朴正熙 대통령이었다. 만 주군관학교 시절 그는 일본이 미국의 石油禁輸 조치에 목이 졸리자 석유자원이 많은 인도네시아를 확보하기 위해 開戰을 결심 하는 과정을 목격했다.
 
 「기름 한 방울은 피 한 방울!」朴正熙는 李承晩대통령이 말을 잘 듣지 않 자 미국이 한국에 대한 석유공급을 전면 중 단하는 사태도 1950년대에 지켜볼 수 있었 다. 그는 정권을 잡자마자 정유공장을 지어 석유의 독립을 확보하는 일에 정책의 최우 선을 두었다.
 
 1963년 7월23일 朴正熙 의장은 해운대로 향 하는 기동차 안에서 기자들과 放談(방담)하 고 있었다. 전년도의 흉작에 기인한 식량난 , 야당의 공세 등 유쾌하지 못한 화제가 계 속되는 가운데 대구역에 도착하자 수행원이 대구에서 나온 지방지를 사서 朴의장에게 건네주었다. 1면은 4대 의혹 사건 등 온통 우울한 기사뿐이었다. 사회면을 펴든 朴의 장은 이렇게 독백하는 것이었다.
 
 『영일만에 油徵(유징)이 있다는데 그곳에 서 기름이라도 쾅쾅 쏟아져나왔으면…』 그는 독백조로 중얼거리더니 신문을 옆으로 내밀었다. 사회면 머리에는 「영일군에 석 유 풀」이란 제목의 기사가 실려 있었다. 朴正熙의 포항석유에 대한 기억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이 첫 인상 때문인지 朴대통령 은 그 뒤 포항에 석유가 있느냐 없느냐로 민간인과 정부기관이 논쟁을 계속할 때 대 체로 민간인들에게 好意的인 태도를 보였다. 포항석유매장설이 한 시대의 爭點으로 떠오 르도록 한 것은 한 아마추어의 집념과 언론 의 흥분된 보도였다. 10년도 넘게 걸린 이 논쟁에서 민간인·언론·정치권력은 대체 로 석유가 「있다」는 편에 섰고 과학자와 기술관료들은 「없다」는 편이었다. 포항사람 鄭宇眞은 어릴 때부터 기름이나 가스와 관계된 것으로 보이는 傳說 같은 이 야기들을 들으면서 자랐다.
 
 「추수를 끝낸 논바닥에서 담배를 피우다가 , 구들을 고치다가, 아궁이에 불을 때다가 까닭 모를 폭발이 일어났다」 1959년 그는 잘 다니던 무역회사를 그만두 고 포항에서 석유를 찾아나섰다. 山野를 누 비면서 석유매장의 증거를 찾고 있던 그는 1963년 2월 경북 영일군 의창면 용한동 동 국마을 야산에서 석유생성의 한 원료인 유 공충 化石帶를 발견했다. 1963년 7월 이 발 견은 한국일보 사회면 머리에 「영일지방에 대규모 유전 있을 듯」이란 제목으로 보도 되었다. 朴正熙 의장이 읽은 기사는 한국일 보 보도 직후의 續報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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