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차 中東전쟁
대통령의 특명을 받은 金允基 조사단은 19 66년 7월12일 국무회의에 조사결과를 보고 했다. 이 보고서의 요지는 제3기 지층에서 유징이 기대되고, 유전용 시추장비와 시험 설비를 갖추는 데 정부에서 민간인을 보조 하는 것이 좋겠다는 내용이었다. 우여곡절 을 거친 끝에 대만으로부터 굴착 능력 150 0m짜리 시추기 한 대가 도입되었다. 鄭宇眞 측의 반발이 계속되는 가운데 지질조사소는 세 군데의 시추를 끝으로 석유 부존 가능 성은 없다는 결론을 내린 뒤 1968년 1월 초 포항에서 철수했다.
1968년 1월9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국립지질 조사소 회의실에서 열린 「포항 천연가스 징후 지구조사 결과 종합 공개 토론회」에서 鄭宇眞과 지질 조사소 측의 대립은 그 절정을 이루었다. 鄭宇眞은 20여 명의 학자들을 상대로 10여년간 독학해 온 지질학 지식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자신 의 논리를 변호했다.
『지질 조사소는 저의 유전에 개입한 이래 일방적 독선을 감행했고…』
『가스가 없는 곳에 시추를 하고 조사를 다 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계란의 흰자위만 뚫어 놓고 노른자위를 볼 수 있겠습니까?』
『한 사람이 여러 사람을 병신 만들기는 쉬 운 일입니다』
이날 국립 지질조사소 朴仁圭 소장은 이렇 게 말하며 토론을 종결했다.
『鑛主(광주)는 유사 이래 어느 누구도 얻 지 못했던 혜택을 정부로부터 받았다고 생 각합니다. 내가 만약 鑛主라면 이런 혜택에 대해 매우 고맙게 여길 겁니다. 지질 조사 소는 鄭宇眞이란 사람을 상대로 한 것이 아 니고 석유를 상대로 일해왔습니다. 鄭宇眞 씨에 대해서는 아무런 적대감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라면 어지간히 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이 회의를 마지막으로 포항 석유 탐사는 중 지되었지만 鄭宇眞, 鄭長出 형제는 포기하 지 않았다.
한국의 공업화는 값싼 석유가 문제없이 공 급될 것이란 전제하에서 진행되었다. 1960 년대 후반 우리는 과감하게 主油從炭정책을 펴 석탄 대신 석유를 가정용으로까지 확산 시키기도 했다. 1971년의 한국 석유소비량 은 5·16혁명이 난 10년 전에 비해 약14배 에 달했다. 1973년 전체 에너지源에서 석유 의 비중은 53.3%에 달했다. 한국의 경제 사 회 군사구조는 깊숙이 석유에 몸을 담가놓 고 있었다.
1973년 10월의 제4차 중동전쟁은 이집트와 시리아의 이스라엘에 대한 兩面 기습작전 으로 시작되었다. 초전에서 밀리던 이스라 엘은 기갑부대와 공군력의 우세를 바탕으로 수에즈 운하를 渡河하여 이집트 領內로 진 출, 逆轉勝의 계기를 잡았다. 이 순간 미국 과 소련이 개입하여 휴전으로 몰고갔다. 아 랍산유국가들은 이집트와 시리아 편에 섰다 . 그들은 같은 회교도의 입장에서 이스라엘 의 우호국가들에 대해 석유공급을 제한, 또 는 금지하는 보복조치를 취하게 되었다. 이 것이 우리 경제사의 최대사건인 제1차 오일 쇼크의 시작이었다.
이해 11월 4일 석유수출기구(OPEC)는 원유 생산량을 25%나 減産하기로 한다고 발표했 다. 아랍산유국들은 소비국을 우호국과 非 우호국으로 나누어 우호국에 대해서는 減産 에도 불구하고 종전대로 석유를 대주겠다고 했다. 朴正熙 정부는 이때 처음으로 한국 이 非우호국가로 분류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유공 울산정유공장에 원유를 공급해온 미국 의 걸프社는 11월6일 『11월 이후 원유공급 을 30% 감축하겠다』고 통보했다. 호남정유 에 원유를 공급해온 칼텍스는 10%, 경인에 너지의 원유공급자인 유니온은 22%를 감축 하겠다고 알려왔다. 당시 90% 이상의 원유 를 중동에서 도입하고 있었던 한국은 치명 타를 맞게 된 것이었다. 이 정도의 석유공 급 감소는 한국 경제의 사실상 마비를 의미 하는 것이었다.
1954년에도 미군은 李承晩 정부와 환율관계 로 마찰을 빚다가 압력수단으로 기름을 끊 어 우리 사회를 대혼란으로 몰아간 적이 있 었다. 하나 다행이었던 것은 당시엔 석탄과 장작, 숯과 같은 연료 사용량에 비해 석유 사용량은 극미량에 불과하여 경제에 준 타 격이 제한적이었다는 점이다. 1961년부터 공업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 서 기름 사용량이 엄청나게 늘어난 데다가 1973년부터 시작된 중화학공업건설은 기름 의 대량소비를 전제로 한 것이었다. 이제는 중화학 공업 추진을 포기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는 비관론이 일기도 했다. 11월8일 金正濂 비서실장은 吳源哲 중화학 공업담당 수석을 불렀다. 실장실에 들어가 니 金실장은 아무 설명도 없이 『서재(대통 령 집무실)로 같이 갑시다』라고 했다. 영 문도 모르고 대통령 집무실에 들어가니 朴 대통령은 책상에 앉아 깊은 생각에 잠겨 있 었다. 金실장은 이렇게 보고하는 것이었다.
『각하, 석유 구하러 吳源哲이를 보내야겠 습니다. 정유공장을 건설할 때 맨 처음부터 관여하여 석유 3社의 최고위층과 친분이 많습니다』
吳수석은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는 응급환 자에게 특효약을 당장 구해오라는 식의 이 말에 깜짝 놀랐다. 자신도 모르게 한 발자 국 물러나면서 말했다고 한다.
『제가 간들 석유 구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金실장은 물러나는 吳수석의 팔을 잡아끌고 는 대통령 앞으로 나갔다. 朴대통령은 吳源哲의 당황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다녀와! 내일 떠나도록 해』라고 한 마 디만 했다. 吳수석의 입에선 『예, 다녀오 겠습니다』란 말이 자동적으로 튀어나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