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유축제설과 논문 소동
1976년 5월에 들어서자 포항석유에 대한 2 차 발표가 있을 것이란 소문이 퍼지기 시작 했다. 5월16일엔 석유축제가 열릴 것이란 소문이 돌기도 했다. 주식이 또다시 뛰기 시작했다.
이때 기자는 논문을 완성했다. 「한국의 석 유개발: 비공개 자료의 분석에 의한 전망과 제언」이란 제목의 원고지 250장 분량의 소책자를 200부 찍었다. 인쇄비 11만원은
『제발 그런 위험한 짓 그만두라』고 말리 던 아내가 댔다. 이 책자를 연구소, 관청, 언론사로 보냈다. 정보부의 지시에 의해서 모든 언론이 포항시추에 대해서 침묵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런 논문이라도 써야 한다 는 강박관념 비슷한 것이 있었기에 논문들 을 다 보내고 나니 후련하기도 했다. 「한국의 석유개발」 제5장에서 기자는 포 항에서 정보부가 뚫고 있는 시추공의 위치 와 이미 밝혀진 지질단면도를 결합시켜 가 능한 최다량의 원유 매장량을 계산해보았다 . 유전 유망지역의 평면적을 최대로 10평방 킬로미터로 잡고 油層의 두께는 10m, 유층 을 형성하는 지층의 암석 空隙率(공극률-바 위 안에 듬성듬성 구멍이 나 있는 공간의 비율. 이 값이 높아야 기름이 많이 스며 있 다는 것이 된다) 20%, 含油率 50%, 採油率 50%로 계산해보니 可採매장량은 약 3천만 배럴이란 추산이 나왔다. 이 수치는 모든 가능성 가운데 최고치를 가정하여 계산한 것이다.
이 최대치를 기준으로 해도 포항 석유로 한 국이 석유를 자급자족하게 되었다느니 세금 을 내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느니 하는 보도 는 터무니없는 과장이라고 기자는 지적했다 . 기자는 포항석유는 경제성이 없거나 있어 도 매장량은 적을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한 보름 뒤 정보부 부산지부에서 좀 보자는 연락이 왔다. 일본 산케이 신문에서 나의 논문을 인용하여 「포항 석유의 경제성은 비관적이다」고 기사를 썼다는 것이다. 정 보부에선 기자가 배포한 보고서를 모두 회 수하라고 강요했다. 그들은 내가 「부득이 한 사정으로 논문을 되돌려주십시오」란 요 지의 글만 써주면 자신들이 대신 회수해주 겠다고 했다. 그렇게 해주었다. 그 보름 뒤 기자는 근무하던 국제신보에서 쫓겨나 실 업자가 되었다. 정보부에선 두 번이나 정보 부의 보도지침을 위반한 기자를 몰아내도록 회사에 압력을 넣었던 것이다. 나중에 기자가 산케이 신문을 얻어 읽어보 니 이 신문의 서울특파원이 쓴 기사는 「한 국 포항 유전 소규모」란 제목으로 외신면 머릿기사에 실려 있었다. 그 요지는 「석 유전문기자인 국제신문의 趙甲濟 기자가 포 항석유와 관련된 試錐자료를 근거로 하여 포항석유에 대해서 비관적인 전망을 했다」 는 것이었다. 이 기사는 「탄화수소(석유와 가스의 화학성분)를 저장해야 하는 지층의 두께가 얇고 탄화수소를 생성시키는 母岩 의 발달이 부족하다」면서 「정부에서 발표 한 포항석유발견이 과연 油層의 존재를 의 미하는지 고립된 소량의 석유발견을 의미하 는지조차 확실하지 않다」는 필자의 주장을 인용했다. 이 기사는 이어서 「趙기자는 과대평가를 해서 매장량을 추산해도 포항석 유는 한국의 연간 소비량에도 미치지 못한 정도라고 주장했다」고 보도했다. 졸지에 실업자가 된 기자는 잡지에 글을 쓰 면서 몇 달을 버티다가 국제상사 신발공장 에 간부사원으로 입사했다. 그 1년 뒤 申稙秀 부장이 金載圭로 바뀐 다음 정보부에서 는 「조용히 신문사로 복직하면 우리도 가 만히 있겠다」는 암시가 왔다. 기자는 197 7년 10월1일자로 국제신문 사회부로 복귀했다. 기자가 실직자 생활을 하고 있던 1976년 8 월 朴대통령은 진해별장에서 여름 휴가를 보내면서 기자회견을 했다. 그는 『포항에 서 석유탐사를 계속했지만 아직 경제성은 확인하지 못했다』고 발표했다. 그동안 포 항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던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