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남 방문
1966년 10월21일 오전 10시 朴正熙 대통령은 4박5일간의 일정으로 월남을 거쳐 마닐라에서 열리는 월남참전 7개국 정상회담에 참석차 김포공항을 출 발했다. 서북항공사(NWA)의 보잉 707기를 전세기로 사용했다. 수행원으로는 李東元 외무부 장관, 金聖恩(김성은) 국방부 장관, 洪鍾哲(홍종철) 공보부 장관, 金炯旭 정보부장, 李厚洛 비서실장, 朴鐘圭 경호실장, 張昌國(장창 국) 합참의장, 曺相鎬(조상호) 의전비서관, 李範奭(이범석) 외무부 의전실 장, 姜永奎(강영규) 아주국장, 張相文(장상문) 歐美국장 등 12명이 동행했 다. 申尙澈(신상철) 駐월남대사와 柳陽洙(유양수) 駐필리핀 대사는 현지에 서 합류하게 되어 있었다.
朴대통령 일행은 21일 오후 2시 홍콩에 도착, 홍콩 총독의 영접을 받으며 1박 한 뒤 22일 오전 9시 30분 홍콩을 출발, 11시 15분에 월남 다낭 공항에 도착했다. 비가 쏟아지는 다낭 공항에는 구엔 반 티우 의장과 구엔 카오 키 월남수상, 카오 반 비엔 월남군 총참모장 등을 포함한 월남 정부 요인들 과 申尙澈 대사 및 蔡命新(채명신) 주월군 사령관이 영접을 나왔다. 朴대통 령 일행은 蔡命新 사령관이 마련한 세 대의 UH-1H 헬기편으로 1년 전 파병 된 맹호사단의 사령부(퀴논)로 출발할 예정이었다. 비가 계속 쏟아지자 蔡命新 사령관은 걱정이 앞섰다.
『각하, 비가 많이 와서 헬기가 제대로 뜰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베트콩 들이 對共사격을 할지도 모르고…』
朴대통령은 아무렇지도 않게 『뭐, 여기까지 왔는데 안 갈 수 있나』라며 앞장서 헬기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蔡사령관은 게릴라들의 對共사격을 피 하기 위해 高空비행을 지시했다. 헬기가 낮게 깔린 비구름 위로 비행한 덕 분에 게릴라들의 對共사격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퀴논 상공에 도착하자 하늘은 맑게 개어 헬기는 무사히 착륙할 수 있었다. 맹호사단 천막 사령부 에 도착한 朴대통령은 蔡命新 사령관으로부터 맹호사단의 작전 경과를 보고 받았다.
1965년 10월 파병 이래 맹호사단은 4차 작전까지 큰 희생자 없이 무사히 마 친 상태였다. 미군이 월맹군을 상대로 「확인 및 섬멸(Search & Destroy)」 작전개념을 구사하는 동안 6·25전쟁을 통해 非正規戰(비정규전)의 神話를 만든 蔡命新 사령관은 독창적인 작전을 수행하고 있었다.
그는 월맹군 지도자 지압 장군이 毛澤東의 「인민은 물, 게릴라는 고기」라 는 전술개념을 이용한다는 점에 착안해 물(인민)과 고기(게릴라)를 분리한 뒤 고기만을 섬멸한다는 「분리 및 섬멸(Cut & Destroy)」이란 작전개념을 세워 밀고 나갔다. 朴대통령에게 蔡사령관은 이렇게 보고했다.
『지난 1년간 월남에서 근무해 보니 가장 무서운 敵은 여자, 노인, 그리고 어린이들 가운데 있었습니다. 월맹군은 이들을 이용해 아군에게 접근, 테 러를 가합니다. 그만큼 민간인을 잘 이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미군은 무 조건 섬멸원칙을 세워 B-52 폭격기까지 동원하지만 저렇게 해서는 미국이 월남전이란 수렁에서 헤어나오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게릴라들을 민간인 들로부터 유리시키는 작전을 수행중입니다. 현재 사단 예하 全中隊를 각 마 을마다 배치하는 중대 전술기지화 작전이 거의 끝나가는 중입니다』
『음. 잘 하고 있어』
고개를 연신 끄덕이는 朴대통령은 기분이 아주 좋아 보였다. 보고를 받은 朴대통령은 인접한 천막에서 맹호 사단이 작전중 노획한 敵裝備(적장비)를 살펴보았다. 朴正熙는 『야, 그동안 무기들 많이 빼앗았네』하며 환하게 웃었다.
1966년 10월 당시 우리의 월남 파병 규모는 4만2500명으로 총인구(2800만 명) 對比 622 對 1. 미군은 31만명이 파병(나중에는 58만까지 파병됨)되어 총인구(1억9300만) 對比 622 對 1. 한국과 우연히 일치하고 있었다. 이 무렵 미국은 우리측에 추가파병을 여러 번 요청해 오고 있었다. 마닐라 정상회담도 미국을 중심으로 아시아 국가들이 단결된 힘을 공산진영에 보 여주자는 목적이 있었다. 월남전선을 방문중이던 朴대통령은 蔡命新 사령관 에게 추가파병과 관련한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이때문에 蔡사령관은 한국 정부가 추가파병을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다고 믿을 정도였다. 蔡命新 사 령관의 회고.
『한국군의 월남파병은 주한미군의 派越을 저지한다는 의미가 컸습니다. 미 국으로서는 나토군을 파병할 수도 없고 본토의 미군을 동원하기에는 선전포 고도 없이 치러진 전쟁이라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들로서 가장 동원하기 쉬 운 사단은 한국에 주둔한 미 제2, 7사단뿐이었습니다. 당시 남북한 군사력 의 격차는 6·25 직전과 별 차이가 없었을 때입니다. 주한 미군이 빠져 나 간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 안보에 부담이 컸을 때였기에 朴대통령 입장은 미 국이 강권하면 추가파병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었을 겁니다』蔡命新 사령관은 朴대통령이 조만간 추가파병도 하겠구나 하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李東元 외무장관의 이야기는 조금 다르다.
『미국은 이미 5만 병력을 파병한 우리에게 추가로 5만을 요구했고 이것은 우리로서는 불가능에 가까웠습니다. 우선 북한이 外交街를 통해 「너희 남 조선 괴뢰들이 제국주의를 도와 민족진영을 공격하는 일을 멈추지 않으면 우리가 또 남침하겠다」는 경고를 공공연히 보내왔습니다. 때맞추어 중공과 소련은 「북한이 남침하면 우리는 북한을 지원하겠다」고 선언하고 있었습 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군에서 다시 5만 명을 뽑아낸다면 안보에 치명적 인 영향을 받는다는 계산이 나왔던 겁니다. 朴대통령도 이를 알고 있었고 저도 미국에게 이런 배경을 설명하면서 「만약 한반도에 전쟁이 터지면 미 국이 월남전과 한국전이란 두 개의 짐을 떠맡게 된다」고 설득했습니다』 추가파병은 불가능함을 익히 알고 있던 朴대통령이지만 전장에 나간 장수에 게 사기를 꺾는 말은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맹호사단 사령부를 방문 중이던 朴대통령은 집합한 派越장병들을 격려한 뒤 다시 다낭을 거쳐 이날 (22일) 저녁 8시 홍콩으로 돌아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