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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코스 필리핀 대통령
 마르코스 필리핀 대통령
 
 1966년 10월23일 일요일 정오, 朴正熙 대통령 일행은 홍콩을 출발, 오후 3 시30분 마닐라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동체에 성조기 마크가 선명하게 그려 진 西北항공사의 전세기는 조종석 창문에 걸어둔 작은 태극기를 휘날리며 환영행사장 앞 붉은 양탄자 앞에 멈추어 섰다. 페르디난드 에드랄린 마르코 스 필리핀 대통령과 나르시소 라모스 外相 등 필리핀 정부 요인들이 기다리 고 있었다. 柳陽洙 駐필리핀 대사와 필리핀 외무성 의전실장이 기내로 올라 가 朴대통령에게 인사를 한 뒤 환영행사 일정에 관한 보고를 했다. 朴대통령이 의전실장의 안내를 받으며 계단을 내려오자 150여 명의 교포들 이 환영했다. 계단을 내려 온 朴대통령과 마르코스 대통령이 악수를 나누며 포옹을 했다. 뒤따라 내려오던 李東元 외무부 장관은 두 사람의 포옹장면 을 보고 『저렇게 닮았을 수가…』하며 놀랐다고 한다.
 「물론 이목구비 하나하나까지 복사판은 아니었으나 마르코스의 분위기는 영락없는 朴대통령이었다. 까무잡잡한 얼굴, 날카로운 눈매에 작은 키, 아 담한 체구, 게다가 카랑카랑한 목소리까지 내겐 분간 못할 혼란이었다. 특 히 도도하고 당당하게 걷는 걸음걸이는, 뒷모습이라면 누구든 쌍둥이라 할 정도였다」(李東元 회고록 「대통령을 그리며」에서).
 
 朴正熙와 마르코스의 닮은 점에 대해서는 당시 外交街의 화제이기도 했다. 두 사람은 외모에서만 닮은 것이 아니었다. 1917년생으로 같은 己巳生(기 사생 뱀띠)인 것은 물론, 그때까지의 人生歷程(인생역정) 또한 비슷했다. 필리핀은 300년 이상 스페인의 식민통치를 거쳐 19세기 말부터 40여년간 미 국의 지배를 받아 온 나라이다. 미국의 식민시대에 마닐라에서 태어난 마르 코스는 필리핀 法大에 재학중 국회의원 말룬 다산의 암살 혐의로 기소되었 으나 무죄를 주장해 1940년 석방되었다. 필리핀이 2차대전 중 일본군에 의 해 점령되자 루손 섬 북쪽에서 게릴라 지도자로 활동하다 일본군 포로가 되 기도 했다. 맥아더가 필리핀을 再수복한 뒤 마르코스는 미국으로부터 최고 명예훈장을 받는 등 終戰할 때까지 도합 27개의 훈장을 받은 군인으로 명성 이 높았다. 종전 후인 1949년 마르코스는 루손 섬에서 하원선거에 출마해 전국 最多득표로 당선되는 기록을 세웠다. 1959년 상원에 진출할 때에도 전 국 최연소 最多득표라는 기록을 세웠고 이어서 상원의장에 출마, 최연소 의 장으로 당선되기도 했다. 마르코스는 1965년 11월 필리핀 대통령 선거에 출 마, 당선됨으로써 국가 지도자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마르코스는 필리핀의 경제적 위기 극복과 국내 질서의 회복에 노력하면서 美·日 등 선진 우방국들과의 관계 설정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1969년에 대통령으로 再選, 1973년에는 3選 개헌을 위해 비상사태를 선언하 고 개헌을 추진했다.
 
 1966년 당시 한국의 1인당 GNP가 130.8달러였을 때, 필리핀은 269달러로 동 남아시아에서 선두그룹에 들어 있었다. 지금 필리핀의 1인당 GNP는 한국의 약 10%인 903달러에 머물고 있다. 32년 동안 한국의 경제성장은 약 52배, 필리핀은 약 3배. 정치역정이 비슷한 두 지도자가 20년 가까이 이끌었던 결과는 이처럼 큰 차이를 보인다.
 
 마르코스는 필리핀을 아시아에서 일본 다음가는 부강한 국가로 이룩하겠다 는 꿈과 패기와 긍지를 갖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웃나라 지도자들과의 경쟁의식도 강했다. 육군소장으로서 최고회의 외교 국방위원장을 역임했던 柳陽洙는 월남참전 7개국 정상회담이 열리던 무렵엔 4년째 필리핀 大使로 근무중이었다. 그는 마르코스에 대해 이렇게 회고했다.
 
 
 『1966년 초 朴대통령의 동남아 순방외교를 준비할 때 저는 필리핀 정부에 朴대통령을 초청해 줄 수 있느냐고 타진했지만 묵묵부답이었습니다. 미국 을 중심으로 마르코스, 朴正熙 두 지도자 간의 경쟁관계가 형성되면서 한국 이 먼저 월남에 전투병력을 파병했다는 사실이 마르코스의 자존심을 건드린 것으로 파악되었습니다.
 
 미국에 대한 마르코스의 입장은 한국과 조금 달랐습니다. 경제발전을 위해 서는 미국으로부터 긴밀한 원조가 필요했지만 48년간 필리핀의 植民母國(식 민모국)이 미국이었기에 부담도 컸습니다. 필리핀에선 미국 식민시대의 독 립운동가들을 찬양하면서 反美분위기가 일상화되어 있었습니다. 역대 필리 핀 대통령들이 미국으로부터 독립하겠다는 노력을 해 온 만큼 마르코스도 필리핀의 자존심을 세우려는 노력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부인 이멜다도 필리핀 문화부흥운동에 앞장서고 있을 때였지요.
 
 반면 필리핀 내부의 인민공산당들은 중공으로부터 무기를 지원받아 마르코 스의 발목을 잡으려 하고 있었습니다. 마르코스는 미국의 월남전 지원 요청 에 응했지만 병참과 군수부대 위주의 지원에 그쳤지요. 6·25 당시 미군을 제외한 참전국 중 가장 먼저 전투병력을 한국에 파병한 필리핀은 우리에게 는 우월의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국 정부가 월남에 전투병력을 파 병했다는 사실이 마르코스에게 충격적이었습니다. 월남파병을 통해 한국이 미국으로부터 많은 원조를 받아낸다는 점도 마르코스에게는 아픈 곳을 찔 리는 듯한 느낌이었을 겁니다. 제가 大使로서 마르코스 대통령을 만나면 표 현은 하지 않지만 분명 뭔가 샘을 내는 듯한 느낌을 받곤 했지요』 월남참전 7개국 정상회담은 당시 李東元 외무장관의 구상에서 시작된 것이 라고 한다.
 
 
 『1966년 초가 되니 東아시아에는 월남참전을 주제로 국가별 서열이 정해졌 습니다. 한국이 4만2500명의 병력을 파병해 선두였고 오스트레일리아 4500 명, 필리핀 2000명, 뉴질랜드 150명이었으며 태국은 17명에 불과했습니다. 1966년 6월14일 아스팍(ASPAC·아시아 태평양각료회의)이 서울에서 열렸을 때 월남 참전국 대표들에게 우리끼리 한 번 모이자는 의견을 내어 만장일 치로 찬성을 얻어냈습니다. 일종의 월남참전국 모임을 만든 것이지요』 정상회담은 참전 각국에게 공통되는 여러 가지 정치적 이익을 가져올 수 있 었기 때문에 이의를 제기하는 나라가 없었다. 이 모임을 주도할 국가는 한 국이어야 한다는 데에도 이의가 없었다. 그런데 일주일쯤 뒤 라모스 필리핀 외상이 마르코스 대통령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자 마르코스가 이 회의는 필 리핀이 주최해야 한다고 우기기 시작했다고 한다. 李東元 장관은 서울에서 열릴 것에 대비해 준비를 하다 라모스 필리핀 외상으로부터 미안하다는 연 락을 받았다. 그 직후 美 국무성의 번디 차관보가 급히 來韓했다.
 
 『번디가 부랴부랴 찾아 온 것은 필리핀의 입장을 살려주자는 설득을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미국에게 한국은 믿을 수 있는 우방이었던 반면, 필리 핀은 겉으로는 미국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지만 뒤돌아서서는 反美적인 발 언을 하고 있어 이번 기회에 마르코스를 달래주자는 것이었습니다』 졸지에 주최국이 바뀌자 朴正熙 대통령은 평소 하지 않던 심한 욕설까지 하 며 화를 냈다고 한다.
 
 
 『마르코스, 이 나쁜 자식. 윤리도 도의도 없는 놈. 이거 우리가 제창했는 데 날치기 아닌가』
 
 회담은 결국 필리핀의 수도 마닐라에서 열리는 것으로 하되 회담 성명서는 한국 외무부에서 작성한 내용을 선택하기로 미국과 합의함으로써 이 문제 는 일단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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