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랑 존슨, 신부 朴正熙
참모로부터 원고를 전달받은 존슨 美 대통령은 원고를 책상 위에 뒤집어 놓 았다. 그리고 마르코스를 향해 의자를 돌려 놓고 앉더니 그를 노려보면서 즉석 연설을 시작했다.
『평화는 그저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Freedom is not free). 책상 위에서 얻어지는 것도 아니며 더구나 예찬만으로 달성되는 것도 아닙니다. 평화는 쟁취하는 것이며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대가를 지불하기 로 결심하고 행동함으로써만 평화는 얻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존슨은 마르코스를 향해 마치 교장 선생님이 학생에게 훈시하듯 기조연설을 시작했다. 마르코스 대통령과 필리핀 정부 각료들의 얼굴은 死色이 되어 갔다. 아침에 있었던 마르코스 필리핀 대통령의 평화론에 대한 반격이자 미 국의 필리핀에 대한 위압이었다. 이날 朴대통령 수행원으로 참석했던 柳陽洙 駐필리핀 대사는 그의 회고록 「大使의 일기장」에서 「굵직한 존슨의 음성은 듣는 이의 폐부를 찌르는 듯했다. 장내는 기침소리 하나 없이 긴장 감이 감돌고 있었다. 천장에 매달린 선풍기만이 천천히 장내의 공기를 휘젓 고 있었다」라고 당시 상황을 기록해 두고 있다.
존슨은 10여분 간에 걸친 훈시 같은 연설을 통해 참전 7개국 정상회담의 목 적을 다시 한번 상기시키고 월남전에 임하는 미국의 결의를 재천명하는 것 으로 끝을 맺었다.
미국에 대들었다가 퉁박을 받은 마르코스를 지켜본 朴正熙는 냉정함을 잃지 않았다고 한다. 첫날 저녁, 마르코스가 朴대통령의 숙소를 예방하고 돌아 가자 李東元장관에게 朴대통령은 이런 말을 하고 있었다.
『李장관, 저 친구 얼굴을 보니 알차게 생겼어. 분명히 쉽게 물러나지 않을 거야』 1966년 10월24일 저녁엔 만찬이 열렸다. 각국 원수들이 검은 예복을 입고 참석한 반면 마르코스는 필리핀 전통의상인 흰 남방차림으로 만찬장 분위기 를 이끌어 갔다. 그는 朴대통령을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행동을 많이 했다. 존슨 대통령이나 다른 외국 頂上들 앞에서는 큰 손짓을 해 가며 열심히 말 하다가도 朴대통령과 마주치기만 하면 입을 꼭 다물곤 가벼운 목례나 악수 정도만 하곤 지나쳤다.
이날 저녁 필리핀의 일간지들은 朴대통령의 월남 파병을 비난하는 글을 싣 고 「매파의 우두머리」 「전쟁을 부추기는 전쟁광」으로 묘사하며 보도했 다. 약이 오른 金炯旭 정보부장은 『저 새끼, 입만 살아서 입만 점점 커지 니…』라며 마르코스를 노려보았다. 만찬장에서 신문 보도 내용을 보고받은 朴대통령은 아무런 표정의 변화없이 담배만 피워대고 있었다. 10월25일 오전에 朴대통령은 한국 기자들과 만났다. 전날 있었던 웨스트 모 어랜드 駐越美軍 사령관의 군사력 강화 필요성 주장과 관련해 朴대통령은
『우리가 있고 남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의 월남 파병은 현재로서 충분하며 더 이상 增派하지 않겠습니다』라고 잘라 말했다.
이날 오전 11시부터 제3차 본회의가 말라카낭宮 소회의실에서 비공개로 속 개되었다. 회의장은 전날의 씁쓸한 공기가 다 가시고 명랑한 분위가로 바뀌 었다. 이날 회의는 예정에 없던 것이었다. 各國 頂上들이 통역 한 명씩만 배석시킨 채 만나는 頂上들만의 비밀회담이었다.
참전 7개국 수행원들은 모두 대회의실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은 처 음엔 사무적인 일로 움직이거나 무엇인가 대화를 나누거나 간밤의 宿醉(숙 취)로 하품을 하는 등 각양각색의 행동을 하다가 시간이 점차 흘러가자 하 나 둘씩 소회의실 문으로 시선을 두기 시작했다. 한 두 시간이 지나도 소식 이 없자 궁금증이 더 퍼지더니 세 시간째부터는 긴장감이 돌기 시작했다. 회담은 오후 2시가 지나서야 끝났다. 소회의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 수행원들의 시선이 일제히 문으로 향했다. 잠시 후 키가 큰 존슨 대통령 과 키가 작은 朴正熙 대통령이 먼저 나타났다. 존슨 대통령의 오른팔이 朴 대통령의 왼팔을 끼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만면에 미소를 띠고 천천히 걸 어 나오고 있었다. 결혼 행진 같았다. 존손은 場內를 향해 왼손을 들어 흔 들기까지 했다.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두 頂上 뒤로 다른 수뇌들 이 한 두명씩 떨어져 걸어나오고 있었다. 場內에서는 박수가 터져 나왔다. 당시 柳陽洙 대사는 『우리가 국제무대에서 이렇게 성공할 수 있었나 하는 감격이 터져나왔다』고 회고했다.
뒤에 밝혀진 사실이지만 이날 회담은 주로 존슨 대통령의 각국 頂上에 대한 설득으로 시종했다고 한다. 필리핀은 약 2200명으로 구성되는 필칵(Philc ag)이라 불리는 工兵과 의무지원 이외에는 증원할 수 없다고 버텼다. 「전 투임무는 절대 불가」란 입장을 취했다. 존슨 대통령은 마르코스 대통령을 끈질기게 설득했지만 별무 소용이었다는 것이다. 존슨과 朴正熙에게 마르 코스는 평화를 추구하되 대가는 지불하지 않겠다는 입장으로 비쳐졌을 것이다. 존슨은 뉴질랜드, 오스트레일리아, 태국 등 세 나라로부터 상당한 규모의 원조와 병력을 증가시키겠다는 확답을 받아낼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한국 은 존슨의 자랑이요, 모범 사례로 인용되곤 했다고 한다. 인구대비 병력 파 병 규모로 보나 파병 성격으로 보나 한국은 최선의 지원을 다하고 있는 국 가로 소개되었다. 이 때문에 이날 회담에서 한국의 증파문제는 거론될 여지 가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존슨 대통령은 이 회담을 진행하면서 한국에 대한 고마움이 새삼 각별하게 느껴졌던 모양이었다. 고마움의 표시로 존슨 은 자신의 가슴에도 못 미치는 작은 키의 朴대통령과 팔짱을 끼고 血盟의 유대를 과시한 것이었다.
이날 오후에는 공동성명서 채택과 선언문 검토를 위한 4차 회의가 진행되었 다. 오후 6시30분, 7개국 정상들은 월남문제의 해결과 아시아 태평양 지역 국가간의 유대강화 및 공동번영을 위한 원칙들을 밝히는 공동성명서, 공동 선언, 자유의 선언 등 3개 문서에 서명하고 이를 발표함으로써 마닐라 정상 회담은 막을 내렸다.
1966년 10월26일 귀국길에 오른 朴대통령 일행은 오후 4시, 김포공항에 도 착했다. 공항에는 李孝祥(이효상) 국회의장, 李相喆(이상철) 국회부의장, 丁一權(정일권) 국무총리, 3府 요인 등과 약 1000여 명의 출영객이 기다리 고 있었다. 陸英修 여사도 아들 志晩군을 데리고 나와 機上으로 올라가 朴 대통령을 영접했다. 陸여사가 『가셨던 일은 잘 되었어요? 고생 많으셨지요 』라고 인사했고 朴대통령은 웃음을 머금은 채 志晩군을 보듬어 안았다. 朴대통령은 도착성명을 통해 『세계사의 중심 무대는 바로 우리가 살고 있 는 이 지역으로 옮겨지고 있으며 우리의 발걸음이 세계사에 크게 남겨지고 있습니다. 남으로부터 도움을 받아오던 우리도 이젠 이웃을 돕는 成年국가 로 발전했기 때문입니다』라고 했다.
그가 국군의장대를 사열하는 동안 전투기들이 하늘에서 오색 연막을 뿌리며 가을 하늘을 화려하게 물들이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