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무부장관 경질사건
1966년 12월13일, 청와대 집무실에서 朴正
熙 대통령은 金炯旭 중앙정보부장으로부터 유엔총회에서 다루어지던 「한국 문제」에 대한 보고를 받고 있었다. 「한국 문제」 란 매년 유엔총회에 상정되어 회원국들간의 투표로 결정되는 것으로 그 내용은 「유엔 총회에 한국을 투표권 없이 한국문제의 토 의에 참석케 한다」는 것이었다. 「한국 단 독 초청안」이기도 한 이 안건이 채택된다 는 것은 한국이 유엔총회에 옵서버로 참석 함과 아울러 한국이 한반도의 유일합법정부 임을 의미하기도 했다.
한국 외교는 매년 가을만 되면 「한국 문제 」를 유엔의 무대로 올려놓고 투표를 거쳐 야 하는 「유엔의 계절」을 맞아야 했다. 연중행사로 치러지던 「한국 문제」가 196 6년에 들어서면서 北韓의 외교적 압박을 받 기 시작했다.
가장 큰 원인은 월남전을 오래 끌게 됨으로 써 국제사회가 전쟁보다 외교를 통한 대결 로 방향을 선회하기 시작한 점이었다. 북한 도 후진국과 공산권 외교에 주력했으며 19 66년 12월2일 제21차 유엔총회에서 북한은 소련의 외무차관을 앞세워 한국문제 토의 에 대항하는 작전을 구사하고 있었다. 이날 북한은 工作을 통해 유엔 회원국이던 아프리카 기니 공화국으로 하여금 『本議題에 우선해서 남북한 동시초청을 중간토의 하자』는 의견을 냈다. 한국에게는 날벼락 같은 제의였지만 기니의 이같은 제의는 유 엔 회의장에서 공산권국가와 중립국가들로 부터 많은 지지를 얻었다. 투표결과 38對 37로 찬성표가 한 표 많았다. 기니의 案이 통과될 경우 대한민국은 한반 도의 유일합법정부로서의 정통성을 상실할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現地에 나가 있던 李東元 외무부장관과 주무국장들은 기니의 案을 무효로 돌리기 위해 필사적이 되었다. 당시 李외무장관을 수행했던 朴槿(박근) 외 무부邦交(방교)국장(73·뒤에 駐美공사, 駐 스위스 대사 역임)은 『李장관은 과로로 肝炎을 앓고 있어 식사를 제대로 못하면서 연 일 藥으로 버티던 생각이 난다』고 회고했다. 기니 공화국의 案은 미국대표가 「議題순서 변경에 의한 제안이므로 단순 다수결이 아 닌 3분의 2 다수결로 결정되어야 한다」고 이의를 제기함으로써 이 문제는 사흘 동안 논란만 지속됐다. 소련과 캄보디아 등 공 산측과 미국 등 서방 13개국의 팽팽한 토의 를 거쳤으나 결론이 나지 않았다. 李東元 장관은 미국측과 접촉하여 지금과 같은 「한국 단일 초청안」이 통과되기 어 렵다면 미국의 유엔 대사였던 스티븐슨案을 조건부로 오는 12월13일 상정하자고 제안 했다. 스티븐슨案은 「유엔이 한국을 우선 초청하며 북한의 경우 유엔의 권위와 권능 을 수락할 경우 초청한다」는 것이었다. 이 른바 「두 개의 한국」이 국제 무대에 최초 로 등장하게 된 계기가 되었지만 당시 李장 관의 이같은 제의는 한국內 언론으로부터 외무부의 유엔 외교 능력을 비판받는 계기 도 되었다(이때부터 25년 뒤인 1991년 9월 18일 남북한은 비로소 유엔에 동시가입하게 되었다-편집자注).
1966년 12월8일 李東元 장관은 기자들과 閑談중에 『유엔사회에 새로운 조류가 일고 있다. 한국의 유엔 외교에 변화가 필요하다 . 지금처럼 외교관들이 돈을 싸들고 제3세 계로 나가 투표권을 구걸하는 방식으로는 국력의 낭비만을 초래한다』는 요지의 발언 을 했다. 李장관의 발언은 다음날 국내 신 문에 기자회견 형식으로 보도되었다. 12월13일 오후 5시30분, 유엔총회 산하 政治委員會는 한국측의 제안을 받은 미국과 서방 13개국이 상정한 안건을 찬성 63표, 반대 24표, 기권 21표로 가결시켰다. 찬성 표는 지난해보다 13표나 많았다. 결과적으 로 한반도에서 한국만이 유엔에 단독 초청 됨으로써 예년과 같은 옵서버 자격을 취득 하기는 했지만 내용면에서는 차후 한국이 유엔 외교에서 난항을 겪게 될 것임을 예고 하는 사건이었다.
12월13일 한국 문제가 통과된 직후 李東元 장관은 유엔 政治委로부터 연설을 요청받 았다. 비슷한 시각에 한국의 청와대에서는 金炯旭 중앙정보부장이 朴正熙 대통령에게 유엔 외교 결과를 보고하고 있었다. 朴대 통령은 공산권의 외교공세가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는 보고를 받고 심기가 좋지 않았 다. 훗날 李東元 前 장관이 전해 들은 바에 의하면 이날 金炯旭 정보부장은 朴대통령 의 怒氣를 틈타 외무부 장관을 更迭(경질) 하게 되는 한 마디를 더 했다고 한다. 李東元 당시 외무부장관의 증언.
『당시 저는 中東순방 유엔총회 캐나다 방 문 등 46일간 예정으로 뛰어다니고 있었지 요. 中東순방을 통해 우리 建設團이 들어갈 여지를 만드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어서 유엔총회에 참석하기 위해 뉴욕에 도착할 무렵, 제가 졸업했던 오하이오州 켄트 대학 교로부터 명예박사학위를 받으러 오라는 초 청이 있었어요. 뉴욕에서 비행기로 이동해 학위를 받고 이날 저녁까지 돌아와야 했습 니다. 유엔 로비에서 우방국 외교관들과의 리셉션이 예정되어 있었는데 오하이오州에 서 폭설로 비행기조차 뜨지 못하는 상황이 되어버린 겁니다. 급히 딘 러스크 국무장 관에게 도움을 요청하여 한 재벌이 이용하 는 자가용 제트기를 얻어 타고 돌아왔지만 리셉션은 이미 끝나버리고 말았지요. 나중 에 李厚洛실장을 통해 전해 들은 이야기입 니다만, 이 사건을 金炯旭이 朴대통령에게 이상하게 보고를 했다고 합니다』 공산권 외교에 한국이 밀린다는 보고와 12 월8일자로 보도된 李장관의 돌출적인 기자 회견에 화가 나 있던 朴대통령에게 金炯旭 은 李장관이 리셉션에 불참한 사실을 보고 했다고 한다.
12월13일 오후, 李東元 장관은 이틀 뒤에 있을 유엔 政治委에서의 연설을 준비하고 있을 때 金溶植(김용식) UN대사가 방문을 두드렸다. 문을 연 李장관에게 金대사는 우 물쭈물하며 전보 용지를 전해주고는 돌아섰 다. 암호 전문을 옮긴 전보를 펼쳐 본 李東元 장관은 들고 있던 안경을 떨어뜨릴 뻔했 다고 한다.
<귀하의 모든 공식 스케줄을 취소하고 급히 귀국할 것>
대통령 비서실장, 태국 대사를 거쳐 1964년 38세란 젊은 나이로 외무부장관이 되어 한 일 회담, 월남파병, 아스팍(ASPAC 아시아 태평양 각료회의) 결성, 한미행정협정 등 주요 외교 현안을 끌어 온 李東元 장관의 落馬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