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뤼브케 서독 대통령 부부 訪韓
 뤼브케 서독 대통령 부부 訪韓
 
 1967년 3월2일 오후 4시, 하인리히 뤼브케 독일 연방공화국(西獨) 대통령과 令夫人 빌헤르민 뤼브케 女史가 한스 비시네브스키 經濟協力相 등 15명의 공식 수행원과 20명 의 비공식 수행원을 대동하고 특별 전용기 편으로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3월6일까지 5일간 체류할 뤼브케 대통령 부부의 訪韓 은 1964년 朴대통령 부부의 訪獨에 대한 答訪(답방)형식으로 朴대통령 부부의 초청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었다.
 뤼브케 서독 대통령 부부는 張基榮(장기영 ) 영접위원장, 李範錫(이범석) 의전실장, 페링 駐韓서독대사의 환영을 받으며 트랩에 서 내려 朴대통령 부부와 인사를 나누었다 . 朴대통령은 3년 전 訪獨 당시를 회상하듯 뤼브케 대통령의 손을 다정하게 잡으며 사 열대로 안내했다.
 
 뤼브케 대통령은 꽃다발을 전하는 네 명의 어린이들에게 즉석에서 호주머니에서 5마 르크 은화 한 닢씩을 꺼내 쥐어 주었다. 陸 여사는 이 모습을 훗날까지 기억하며 자신 이 붙인 「紳士 할아버지」란 별칭을 뤼브 케 대통령에게 사용하곤 했다. 뤼브케 대통령은 서독을 떠나기 전 朝鮮日報 李基陽(이기양) 특파원과 만난 자리에서 『원조자금을 기한 내에 이자와 함께 척척 돌려주는 한국이야말로 외국 원조의 필요 성을 증명해 주었다』며 기뻐했었다. 朴대통령의 처조카이자 부속실 직원이던 洪晶子씨는 존슨 미국 대통령의 訪韓과 뤼브 케 서독 대통령의 訪韓에 朴대통령의 心情 엔 근본적인 차이가 있었다고 회고했다.
 
 『서독을 다녀오셨을 때 아저씨(朴대통령) 는 결코 기뻐하는 표정이 아니었습니다. 오 히려 침통했다고 할까요. 우리의 광부와 간 호원들이 고생하는 모습을 기억하며 일에 박차를 가하고 연일 기공식이다 뭐다 해서 건설현장에 나가는 횟수가 잦았습니다. 이 모님(陸여사)도 「할 것 많아. 이제부터야 」라며 일을 많이 하셨어요. 덕분에 저는 힘들어 죽을 맛이었지만 말이지요. 월남 파병이 있고 난 후 蔡命新 주월 한국 군 사령관으로부터 보고를 들을 때는 의욕 을 찾곤 했어요. 그래서 1966년 10월 존슨 대통령이 방한했을 때는 기가 펴졌었는데 , 불과 몇 달 사이지만 뤼브케 대통령의 방 한 때는 비장한 결심이 대통령의 얼굴에 비 치곤 했습니다』
 
 뤼브케 대통령 부부는 4시30분, 朴대통령의 전용차에 나눠타고 김포가도와 제2한강교 를 지났다. 연도에는 약 60만명의 서울 시 민과 학생들 및 1000명의 사관생도들로부터 환영을 받았다. 뤼브케 대통령 일행이 도 착하기 직전에 환영행사에 동원되어 대기중 이던 공군사관생도 중 한 명이 브레이크 고 장으로 달려드는 차량과 충돌, 사망하는 사 건이 벌어졌다. 이 사건은 뤼브케 대통령에 게도 보고되었고 서독 대통령은 離韓할 때 특별한 弔意를 표하기도 했다. 오후 5시20분 장충동 迎賓館에 도착한 뤼브 케 대통령 부부는 약 1시간반 동안 조용한 시간을 가졌다. 뤼브케 대통령이 거실에 놓인 한국소개 팸플릿을 펼쳐 보는 동안 令夫人은 목욕을 마친 뒤 홍차에 韓國産 꿀을 타 줄 것을 청했다. 뤼브케 대통령이 본 팸플릿들은 「판문점」 「韓國史」 등 17가 지 종류를 공보처에서 독일어판으로 제작한 것들이었다.
 
 청와대를 예방하러 떠나기 10분 전에 뤼브 케 대통령은 迎賓館의 아름다운 경치를 보 겠다며 정문을 나서 안내원들이 당황하기도 했다. 그는 동쪽에 높이 솟은 팔각정을 쳐 다보더니 『내일은 저곳에 올라가 서울 경 치를 보겠다』고 말했다.
 
 뤼브케 대통령 부부 일행은 이날 오후 7시 30분, 朴正熙 대통령 부부가 초청하는 非公式 만찬에 참석했다. 이날 양국 원수는 선 물을 교환했는데 의미 있는 선물들이 많았다. 뤼브케 대통령은 먼저 朴대통령에게 서독 정부가 한국 정부에 주는 선물이라면서 X선 촬영기 한 대를 전달했다. 독일의 물리학 자 뢴트겐이 발명한 이 기계는 전남대학교 의과대학에 기증되었다. 뤼브케 대통령은 朴대통령에게 독일제 전축과 녹음기 한 대 씩을 선사했고 장녀 槿惠양에게는 소형 전 축 한 대, 차녀 槿暎양에게는 타자기 한 대 , 志晩군에게는 장난감을 선물했다. 朴대통 령은 뤼브케 대통령에게 고려대학교 아세아 문제 연구소가 간추린 「舊韓末에 있어서 의 韓獨관계 외교문서」를 전달한 뒤 자개 문갑, 가야금, 거문고와 전국 사찰의 梵鍾 소리를 녹음한 레코드 한 장을 전달했다. 朴대통령측 통역엔 金泰卿(김태경)씨가 맡 았고, 뤼브케 대통령측 통역은 당시 서강대 학교 獨文科 郭福祿(곽복록·78·서강대 명 예교수) 교수가 담당했다. 郭福祿교수는 『 당시 서독의 정치체제가 내각제였고 뤼브케 대통령의 권한이 朴대통령과 같지 않았던 만큼 큰 정치적 議題는 없었다』고 기억했다. 1967년 3월3일 오후 韓獨 두 정상이 兩國間 通商條約과 문화 교류에 합의하는 등 약 한 시간 동안 단독 회담을 진행하는 동안 경제기획원 회의실에서는 張基榮 경제기획 원 장관과 한스 비시네브스키 독일 경제협 력相과의 회담이 진행됐다. 英語로 이중 통 역을 거쳐 진행하면서 불과 40분 만에 끝난 이 회담에서 한국측은 1억 달러의 長期 低利차관을 요청했고 서독측은 최대한 노력하 겠다고 대답했으며 울산에서 3월4일 기공될 영남화력발전소의 차관조건을 7년 거치 후 13년 상환, 年利 3%로 결정하고 釜山화력 발전소의 차관은 상환기간을 10년으로 하도 록 양해를 얻어냈다.
 
 영남화력발전소의 경우 서독 차관에 의해 건설되는 첫번째 기간산업시설물로서 서독 차관 2200만 달러와 內資 18억7900만원으 로 1969년에 완공될 국내 최대의 발전소(20만kw)였다. 뤼브케 대통령을 수행하며 통역을 담당했던 郭福祿 당시 서강대 교수는 『당시 한국 지식인 사회에서는 서독의 경제지원은 미국 과 비교되곤 했습니다. 미국은 밀가루와 설 탕 등 소비재 중심의 원조만 해 준데 비해 서독은 기간산업시설을 건설하도록 지원한 다는 시각이 컸습니다』라고 했다. 朴正熙 대통령 부부는 3월5일 오후 8시부터 조선호텔에서 뤼브케 대통령 초청 만찬에 참석했다. 朴대통령은 뤼브케 대통령의 건 강을 염려하며 『한국의 날씨가 각하를 힘 들게 하지 않았는지』를 물었고 뤼브케 대 통령은 『날씨가 독일과 비슷해서 지내기 좋았다』고 말하면서 영빈관의 아름다움을 격찬했다.
 
 1967년 3월6일 오전 10시45분 뤼브케 서독 대통령 부부 일행은 5일간의 한국 방문을 마치고 특별기 편으로 김포공항을 출발, 다음 방문지인 태국으로 떠났다. 분단의 아픔을 나누며 절친한 관계를 약속 했던 韓獨 兩國은 그로부터 13개월 후인 1 968년 4월13일 「東伯林(동백림) 사건」으 로 兩國관계에 깊은 상처를 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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