迎賓館 開館式
1967년 2월28일 오후 4시, 朴正熙 대통령 부부는 長女 槿惠양과 장남 志晩군을 데리 고 장춘체육관 바로 뒷자리에 완공된 迎賓館(영빈관·뒤에 신라호텔에 매각)에 도착 해 開館式에 참석했다. 迎賓館은 1958년 李承晩 대통령의 지시로 착공되었으나 정권의 변동으로 한동안 중지되었다가 1966년 6월 에 朴대통령의 지시에 의해 총무처에서 2억 6000만원을 들여 재착공, 9개월 만에 완성 되었다.
외국 수상급 이상 國賓 행사와 국내 3府 요 인 및 장관급 이상 공식 연회를 위해 건설 된 영빈관은 총무부에 의해 완공되어 1967 년 2월25일자로 당시 반도호텔을 운영하던 국제관광공사(現 한국관광공사)에 受託(수 탁) 운영되다가 1973년 용도폐지 결정에 따 라 민간에 불하되면서 三星그룹(現 신라호 텔측)으로 매각되었다.
장충 체육관 뒷산의 博文寺(박문사) 옛 터 전에 자리잡은 영빈관은 花草 담 길이만 2 56m에 청기와를 얹은 본관 건물을 중심으로 두 채의 팔각정과 一角門 등 부속건물이 있었다. 창덕궁의 熙政堂(희정당)을 본따 지어진 영빈관의 본관은 25개의 대소 거실 들이 貴賓用, 社交用, 管理用으로 나뉘어져 있고 폭포수도 설치되었다. 당시 총무처 장관 李錫濟의 회고.
『國有地로 남아 있던 절터였는데 垈地가 3만3200평에 달해 지금의 자유총연맹 자리 까지 긴 모양의 땅이 있었습니다. 처음에 가 보니 건물은 하나도 없고 돌계단만 있었 지요.
가장 어려웠던 점은 동양식 건물에 서양식 내부를 조화롭게 결합시키는 일이었습니다. 韓屋의 처마 곡선과 기둥의 굵기와 높이 가 조화를 잃으면 난쟁이처럼 되거나 키 큰 여자가 어린애 한복 입은 모양이 되곤 했 습니다』
朴대통령에게 건물 설계도를 들고 가 보고 했으나 朴대통령은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 다고 한다. 李錫濟 장관은 외국에 귀빈으로 초빙받아 본 경험이 있는 陸英修여사의 도 움을 청하기로 하고 1967년 1월26일 陸英修 여사와 迎賓館 건설 현장을 방문했다.
『처음에 陸여사는 「제가 나가 봐야 뭘 알 겠습니까」라며 겸손하게 거절했지만, 제가 꼭 모시고 싶은 분이어서 두어 번 간청했 지요. 아마 陸여사도 가 보고 싶었을 겁니 다. 그분은 보통 섬세한 분이 아니라고 알 고 있었는데 막상 모시고 가니 그만한 보람 이 있었습니다』
현장에 도착했을 때 건물은 거의 다 지어져 있었고 실내도 완공을 한 달쯤 앞둔 상태 였다. 李장관은 陸여사에게 境內를 안내한 뒤 건물 내부의 내장과 화장실 및 각종 서 비스 공간을 설명했다. 陸여사는 조심스럽 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해 갔다고 한다.
『화장실 손잡이의 경우, 陸여사는 서양인 들의 평균 키를 생각해서 그분들의 입장에 서 어깨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 높이로 조금 더 올려 달면 어떻냐고 하십디다. 우리가 미처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했지요. 화장실 은 男女 구별이 되어 있었지만 푯말을 어떻 게 써 붙여야 할지 몰라 제가 물어 보기도 했습니다. 陸여사는 그림으로 표시하는 게 좋겠다고 하셔서 그렇게 결정했지요. 또 실내에 햇볕이 잘 들어오게 되어 있는데 정신적으로 자극을 안 받고 쉴 수 있도록 은은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해 보는 것이 어떠냐고 하십디다. 하시는 말마다 다 맞는 얘기였습니다. 모두 받아 적어서 그대로 고쳤습니다』
이후 陸英修 여사는 부속실 직원을 대동하 고 공사현장을 자주 방문하면서 외국 자료 와 자신의 외국방문 경험을 참고로 하여 현 장 감독에게 자신의 의견을 전하곤 했다고 한다. 陸여사는 부속실에서 미국방문 후 기념으로 가져 온 백악관 소개 책자를 들여 다보면서 『애고, 돈이 없으니 이렇게는 할 수 없고…』하며 아쉬워 하기도 했고 천장 이 서양식으로 높이 설계된 것에 대해 『천 장을 외국처럼 높이 하면 난방비가 많이 들 겠지? 하지만 이미 만들어진 걸 어째』라며 아쉬워하기도 했다.
迎賓館의 첫 손님은 開館式으로부터 이틀 뒤인 3월2일 來訪할 西獨의 뤼브케 대통령 부부였다. 陸여사는 부속실에 근무하던 조 카 洪晶子를 데리고 한창 공사중이던 迎賓館을 찾아가 커튼과 실내장식에 대한 지시 를 내리면서 『커튼감은 너무 투박하거나 두껍게 느껴지지 않는 것으로 하고…』라면 서 『그 紳士 할아버지(뤼브케 대통령)가 춥지 않으셔야 할 텐데』라고 했다. 당시 청와대 부속실의 日誌는 영빈관과 관 련하여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朴木月 의 「陸英修 女史」에서 인용). 〈1967년 1월26일 2시30분:총무처장 대동하 여 영빈관을 둘러보시고 몇 가지 지적, 고 치게 하심. 2월13일:陽地會(양지회) 간부와 베갯잇을 만듦(영빈관용). 2월18일 4시45 분:선물용 천을 끊으러 나감. 2월20일:여사 접견실에 장식한 사진을 訪獨時의 사진으 로 바꿔 담. 2월23일 3시:뤼브케 대통령 訪韓時 만찬회에 쓰일 꽃꽂이를 준비, 高씨 만남. 3시30분:할머니(李慶齡 여사)를 동반 , 영빈관을 둘러 보심. 선물용 한복 준비. 2월27일 5시:駐獨 대사 부인 접견(뤼브케 대통령 방한에 대한 상의). 2월28일 4시3 0분:영빈관 테이프 커팅 (내외분)〉 1967년 2월28일 오후, 개관 기념 테이프를 끊은 朴대통령 내외는 構內(구내)를 돌아 보며 최종점검을 했다.
朴대통령 부부에게 3월2일 訪韓하는 뤼브케 서독 대통령은 특별한 경우였다. 유럽 지 역에서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하는 국가 원 수이기도 했지만, 뤼브케 대통령이 72세의 고령이라는 점을 신경쓰지 않을 수가 없었 다. 또한 1964년 朴대통령 부부가 서독을 방문했을 때 각별히 厚待(후대)해 준 점도 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영빈관 내부를 둘러보던 朴대통령 부부가 2층 침실에 이르렀을 때 두 사람은 미소를 가득 지었다. 방은 황금색으로 장식되었고 침대 옆에는 왕실용 전화기가 고풍스러운 멋을 돋우어 주었다. 朴대통령은 만족스러 운 듯 『서울에 명물이 하나 늘었어』라며 환하게 웃었다.
침실에서 거실로 나온 陸여사는 장롱 문을 열어보았다. 자개 장식의 옷장문을 열자 그 속에 뤼브케 서독 대통령 부부가 사용할 가운이 두 벌 걸려 있었다. 이날 陸여사는 뤼브케 대통령이 거처할 방의 재떨이, 책 상보, 침대보 등을 일일이 들춰 보며 미흡 한 점이 없는지 세심한 신경을 썼다. 陸여사는 청와대로 돌아온 직후 朴대통령이 집무실에 간 사이 급히 전화로 실무자를 불러냈다. 옷장에서 풍기는 나무 냄새를 없 애라고 지시를 내리는 것이었다. 비서실 측 근들은 陸여사가 朴대통령 앞에서 실무자들 을 무안하게 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모습에 감탄했다고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