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穗根 탈출사건
1967년 3월5일 위싱턴 포스트紙는 한국 특 집을 마련하고 朴正熙 대통령 丁一權 국무 총리 金鍾泌 공화당 의장 張基榮 부총리 李東元 前 외무부장관 尹潽善 대통령 후 보 兪鎭午 신민당 당수 등 일곱 명을 「한 국의 지도자」로 선정하고 論評을 달았다. ▲朴正熙 대통령:불과 49세, 높은 자리에 앉는 데는 力量(역량)보다 年齡(연령)이 중 시되는 아시아에서 국가원수로는 젊은 나이 이다. 과묵한 사람으로 公私를 막론하고 경 솔한 짓은 안할 사람이다. 「謹嚴(근엄)」 이란 말이 그에 대한 評으로 씌어지고 있는 데 領導力에 대한 자신이 붙어가고 있다는 증거다.
▲丁一權 총리:매사가 분명하며 사교적인데 1971년의 朴대통령 후계자로 물망이 높다. ▲金鍾泌 공화당 의장:근래 公的인 활동이 눈에 띄지 않고 있으나 朴대통령 다음 가 는 제2인자이다. 허세가 없고 자기의 역량 에 자신 만만한 듯하다. 丁一權씨와 더불어 朴대통령의 후계자 후보이다. ▲張基榮 부총리:추진력 있고 정력적인 型 . 질문을 받으면 잠시 생각하다가 기관총처 럼 대답한다.
▲李東元 前 외무부장관:창의적이지만 판단 과 말이 빨라 말썽.
▲尹潽善씨:名門에서 태어난 점잖은 紳士이 며 朴대통령의 정부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兪鎭午씨:세련된 지식인인데 정부에 대해 비판적이기는 하나 온건한 편으로 정부가 잘 한 점은 이를 인정하는 태도이다. 1967년 제6대 대통령 선거(5월3일)와 제7대 국회의원 선거(6월8일)가 예정된 가운데 3월12일 朴대통령은 전국 131개 지역구의 국회의원 후보 공천을 마쳤다. 지난해 말부 터 金鍾泌 공화당 의장에 의해 시작된 공천 작업은 수시로 朴대통령의 의향을 타진하 며 진행해 오다 12일 밤 청와대에서 朴대통 령과 金鍾泌 공화당 의장 및 吉在號 사무총 장과 함께 최종 결정되었다. 공화당 총재를 지낸 鄭求瑛의 회고록에 따 르면 당시 金鍾泌의 공천권은 제한되어 있 었다는 것이다. 黨에서는 吉在號 사무총장 , 金成坤 재정위원장, 청와대의 李厚洛 비 서실장, 金炯旭 정보부장 이 네 사람이 협 의해서 청와대로 자료를 올렸고 대통령은 이것을 토대로 공천을 결정한 것이라고 한다. 다음날 오후 2시30분 공화당은 대통령 선거 지역당 대책위원장을 임명하는 형식으로 공천자 명단을 발표했다. 한편, 지난 2월7 일 民衆黨(민중당)과 新韓黨(신한당)이 合黨하여 출범한 新民黨(신민당·당수 兪鎭午 의원, 총무 金泳三 의원, 대변인 金大中 의원)은 3월18일 民衆系 55명, 新韓系 56명 을 국회의원 후보로 공천, 발표했다. 선거 분위기가 무르익어 갈 무렵이던 3월2 2일 오후 5시23분, 판문점에서 북한의 중앙 통신사 부사장 李穗根(이수근·44)이 유엔 군 군사정전위원 벤코프트 준장의 차에 올 라타고 南行을 결행, 북괴군의 권총사격을 피해 무사히 歸順하는 데 성공했다. 이같 은 사실은 이날 저녁부터 국내외 언론을 통 해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같은 날 朴대통령은 金江大橋와 全州 공업 단지 기공식에 참석했다가 全州에서 묵은 뒤 23일 오전 특별 기동차 편으로 상경했다 . 상경 도중 李厚洛 비서실장은 옆 칸에 동 승한 기자들을 불러 朴대통령과의 회견을 주선했다. 朴대통령은 기자들이 李穗根의 귀순 사실에 대해 묻자 『신문에 난 걸 보 니 李씨가 부상당한 것 같지는 않더라』면 서 『지금껏 귀순한 北傀 언론인 중에서 최 고 거물이니 광범위한 정보를 얻게 되었어 』라며 흐믓해 했다. 朴대통령은 또 『우리 가 北傀보다 잘 살고 있다는 실정을 李씨가 보여주었다』면서 『우리의 底力이 경제건 설에 있는데 動車를 타고 다닐 때마다 밖을 내다보면 100가지 할 일이 생각나지만 財力이 모자라 다하지 못한다』고 상기된 표 정을 지었다.
1965년 당시만 해도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 은 105달러로 북한(162달러)에 뒤지고 있었 지만 1966년에 들어서면서 격차를 좁히기 시작하여 1970년에는 남한(252달러)이 북한 (230달러)을 추월하기 시작했다. 북한은 이 후 1990년(1064달러)과 1991년(1038달러) 단 두 차례만 국민소득이 1000달러代(이것 은 우리 정부의 통계이고 실제는 이보다 낮 다)를 넘어섰을 뿐 현재까지 100단위의 후 진국에 머물러 있는 반면(1998년 573달러) , 대한민국은 1인당 GNP가 1만 달러를 넘어 섰다. 李穗根 귀순 당시 朴대통령은 「경제 건설만이 공산주의를 물리칠 수 있다」는 자신의 신념을 재삼 확인했을 것이다.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북한 고위층 언론인 귀순사건」은 약 2년 뒤인 1969년 1월30일 위조 여권으로 몰래 출국한 李穗根 을 중앙정보부가 사이공에서 체포함으로써 「李穗根 위장귀순 간첩사건」으로 다시 한번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된다. 기자는 이 사건을 추적하다가 20년이 지난 1989년에 월간조선 3월호를 통해 『이수근 은 간첩이 아니었다』는 기사를 쓰게 됐다 . 귀순한 북한 노동당 간부를 통해 「李穗根은 간첩이 아니었다」는 증언을 확보할 수도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