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에 대한 懷疑
1967년 4월22일 토요일 아침 朴正熙 후보와 후보반 일행은 특별 기동차 편으로 부산으 로 향했다. 대통령 전용 기동열차는 총 2량 으로 앞 칸은 「각하실」과 「수행원실」로 나뉘어 있었고, 뒷 칸은 「기자실」로 되 어 있었다. 이날 수행원실에는 朴鐘圭 청와 대 경호실장, 李厚洛 비서실장, 吉在號 사 무총장, 金成坤 재정위원장 및 대통령 비서 실에 근무하는 朱冠中 정무수석이 타고 있 었다.
동차가 서울을 출발하여 경기도로 들어서자 朴후보는 창밖을 한참 동안 내다보다가 『 올 해는 보리 농사가 잘 됐구먼』하며 미소 를 지었다.
朴후보는 기자들을 불러 환담을 나누던 중 이날 서울 남산 야외음악당에서 있을 尹潽善후보의 연설과 관련해서 이런 말을 했다.
『관계관들은 남산 야외음악당을 신민당 유 세장소로 허가해주는 데 반대했는데, 내가 허가해 주라고 서울 시장에게 지시했소. 김현옥 서울 시장은 음악당 주변에 3백만원 의 예산을 들여 나무를 심어 놓았는데 나무 가 상할 것이라고 울상을 짓더구먼』 朴후보는 야당이 유세때마다 사전에 가두방 송 비라 살포 등으로 청중들을 동원하고 행 진까지 벌이고 있는 사실을 들며 『그 사람 들 법을 너무 무시하더군』이라고 가볍게 말했다.
기차는 이날 오후 1시30분 부산진역에 도착 했다. 朴후보는 역장실에 들러 잠시 휴식한 뒤 오후 2시 ㅀ♧?초량역 광장에 승용차 편막?도착했다.
유세장은 朴후보가 도착하기 한 시간 전부 터 인기가수들의 노래를 방송하는 등 흥을 돋구었다. 언론사들은 부산 유세장에 모인 청중수를 약 23만 명으로 추산하고 있었다. 같은 시각 尹潽善 후보측 유세장인 서울 남 산 야외음악당 주변은 오전부터 사람들로 뒤덮이다시피 했다. 언론사 추정 약 25만명. 尹潽善은 그의 회고록에서 「사실 서울에서 의 반응으로 보아 朴정권이 아무리 부정을 선거를 치른다 해도 결코 내가 불리하리라 고 생각하지 않았다」고 쓰고 있다. 부산 유세장에서 가장 먼저 연단에 오른 金鍾泌 의장은 朴후보를 지지해 줄 것을 호소 하고 내려왔다.
오후 2시30분, 검은 색 싱글 차림에 검은 넥타이를 맨 朴후보는 연단에 올라 48분간 연설을 했다. 朴후보는 『내가 보기에는 全부산 시민이 다 나온 것 같은데 집 볼 사 람이나 계십니까』라며 농담을 하자 청중들 이 박수로 화답했다. 이날 朴후보는 『야당 은 당장에 잘 살 수 있다는 말을 하면서 선 심공세를 하고 있다』며 가볍게 비난하고
『야당 주장대로 하자면 대전에 있는 조폐 공사에서 돈을 마구 찍어내도 모자란다』고 비꼬았다.
당시 朝鮮日報는 부산과 서울 유세장에 중 견작가 崔貞熙(女·작고), 李浩哲을 보내, 유세 참관記를 실었다. 부산 초량역 광장 에서 朴후보의 유세를 참관한 작가 崔貞熙 는 청중들이 이런 대화를 옮겨 적었다. <내가 앉은 주변엔 할머니들이 많이 앉아 있었다. 할머니들은 朴正熙 후보가 왜 저리 살이 안붙었냐고 걱정이다.
『면사무소에 한자리만 차지해도 기림(기름 )이 반들거리는데 저 높은 양반이 와 저럴꼬』
『아따 모르는 소리 작작 하소. 나랏일 생 각만 하고 살만 짜드레 쪄도 탈이 아닝교』> 비슷한 시각, 서울 남산 야외음악당에 나온 작가 李浩哲은 「鬱憤(울분)이 지나친 호 소」라는 제목의 소감문을 썼다. 그는 「공 화당 유세 앞에서는 우리의 민주주의?그 럴 수 없이 밝은 모습을 지니고 있지만, 여 기 신민당 유세 앞에서는 우리의 민주주의 가 잔뜩 그늘진 모습을 지닌다」고 했다. <이 사람들에게 新民黨은 무슨 얘기를 하였 을까? 과연 귀가 번쩍 뜨일 무슨 얘기를 하 였을까. 앞으로 정권을 잡으면 어쩌겠다는 소리를 분명히 안들은 것도 아닌데 귀에 남은 것이 별로 없는 듯하다. 이것은 내 탓 인가. 新民黨 탓인가.
그들은 한 마디로 너무도 지나치게 울분에 사무쳐 있는 듯하다. 우리가 모를 그들대 로의 사정이 있을 테지>
4월22일 釜山 유세를 마친 朴正熙 후보는 海雲臺 극동호텔에서 묵으며 참모들과 회합 을 가졌다. 이날 참모들이 『청중이 50만명 은 모였는데 신문들이 절반 이하로 보는 것 같습니다』라고 불만스럽게 말하자 朴正熙 는 『그만하면 어떻소. 아프리카에 가면 그 만한 인구의 독립국가도 있는데…』라며 달랬다. 4월23일 일요일 오후 1시 30분, 朴正熙후보 는 특별 기동차 편으로 大邱에 도착했다. 朴후보가 大邱역에 내리자 驛前에서 유세장 소인 壽城川邊(수성천변)에 이르기까지 시 민들이 박수로 朴후보를 맞았다. 이날 아침 陸英修는 大田 유세에 이어 두번 째로 大邱 유세장에 참석하기 위해 여객기 편으로 대구에 도착해 있다가 유세장에서 朴후보와 만나 나란히 본부석에 앉았다. 金鍾泌 당의장, 李孝祥 국회의장, 安浩相씨 등이 지지 유세를 위해 동석했다. 이날 大邱 수성천변에는 역대 최대 청중인 약 30만 명(5代 때 15만명)이 모여들었다 . 오후 2시40분에 연단에 오른 朴후보는 1 시간10분 동안 연설하면서 『1975년까지는 반드시 근대화를 완성할 것』이라고 한 뒤 『야당은 거짓말, 생떼, 중상모략을 하는 데 세계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워 한다』고 했다. 朴후보를 줄곧 수행했던 朱冠中 정무비서관의 회고.
『朴대통령은 솔직 담백한 성품이어서 적당 히 과장하거나 축소하여 말하는 법에 익숙 하지 못했습니다. 선거란 과장과 축소가 따 를 수밖에 없는 정치 광고戰이다보니 유세 를 할수록 야당의 억지가 朴대통령의 심기 를 자극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판에 선거 유세가 종반에 이르자 朴대 통령은 선거 자체에 懷疑的인 표정이 역력 했습니다. 훗날 등장하는 3選 개헌과 10월 維新의 배경에는 이런 심정도 작용했으리 라 봅니다. 朴대통령의 야당에 대한 不信이 강화된 것도 선거를 통해서라고 봅니다. 가끔씩 朴대통령이 비서관실에 와서 한 마 디 툭 뱉는 말 중에 「法대로 하면 獨裁가 아니다. 改憲도, 무엇도 法대로 하면 民主主義다. 思想, 理念보다 法이 중요하다. 選擧도 法에 있으니까 해 보는 것이다」란 말 도 이런 배경에서 나온 말일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