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의 한국전쟁
1967년 7월1일 제6대 대통령에 취임한 朴正熙는 1966년 말로 매듭지어진 제 1차 5개년 경제개발계획에 연이어 실시된 제2차 경제개발계획에 몰두해야 했다. 연임제下에서 再任(재임)된 朴대통령에게 임기內 조국 근대화의 기틀 을 완성할 만한 시간적 여유는 거의 없었다. 이무렵 朴대통령에게는 극복하 지 않으면 안될 두 가지 큰 장애물이 기다리고 있었다.
가장 큰 장애는 대한민국의 안보를 위협하는 북한의 對南 도발이었다. 북한 은 1946년 이래 연평균 20여 건의 對南 도발 및 간첩단 사건 등을 일으키더 니 1965년 한국이 월남에 전투병력을 파병하자 그 횟수와 강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1965년에 48건, 1966년에 59건, 1967년에는 對南도발 사상 최고인 140건을 기록했다(1968년 86건, 1969년 73건, 1970년 53건). 1966년에서 1969년까지의 통계에 따르면 비무장지대에서 540건의 총격전이 벌어졌다.
북한군은 대한민국 후방에 제2전선을 형성하기 위해 특공대를 침투시켰고, 그런 남북 쌍방의 충돌로 전사한 북한군은 397명, 전사한 한국 군과 미군은 364명이었다. 1967년에만 한 달 평균 열 건 이상 무장공비 침 투사건 혹은 간첩단 사건이 신문에 실리고 있었다. 당시 신문에서는 다른 뉴스에 밀려 사회면 中級(중급) 기사 수준으로 취급하고 있었다. 대통령 취임식이 열리던 1967년 7월1일 오후에도 강원도 양구군 전방에서 드리쿼터를 타고 귀대하던 아군에게 무장공비가 수류탄을 투척해 장교와 사 병 7명이 그 자리에서 사망했으며, 이날부터 사흘 동안 전방에서만 무장침 투 간첩 10명이 아군의 저지선에 걸려 사살되기도 했다.
당시 국방장관 金聖恩의 회고.
『월남파병 직후부터 북한은 對南공세를 강화했습니다. 1967년에는 우리 정 부가 월남에서 싸우던 한국군을 신경 쓸 틈이 없었습니다. 국방장관인 저조 차 매일 아침에 보고되는 공비 사살 보고서를 청와대로 들고 가곤 했으니 제2의 한국전쟁을 치르고 있었던 겁니다. 이 무렵 미군은 우리에게 增派(증 파)를 요구해 왔지만 그때마다 이런 사건들이 增派를 거부하는 구실로 제공 되었습니다.
북한도 이것을 노린 것이라고 봅니다. 朴대통령도 「金日成이 가 胡志明을 돕기 위해 우리를 치는군」이라고 말했습니다』朴正熙의 근대화 進軍을 방해하는 두 번째 장애물은 6·8 선거부정의 후유 증이었다. 신민당을 포함한 야당과 학생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 고 부정선거 규탄대회가 전국으로 번지기 시작했다.
7월5일 신민당 金大中 대변인은 『신민당은 6·8 총선거 무효소송을 일괄 제기하기로 했으며 지역구 낙선자가 개별적으로 선거 무효소송을 내는 것도 당에서는 묵인할 방침』이라며 정부 여당과의 非타협적 입장을 표명했다. 7월6일 朴正熙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기자들과 환담하는 가운데 신민당의 일 괄제소 방침을 전해듣고 이렇게 말했다.
『부정선거를 하려면 정권을 바꿀 수 있는 대통령 선거 때 할 것이지 하필 이면 국회의원 선거 때 했겠소? 일부 선거 부정지구에 대한 수사결과를 7일 검찰이 발표할 예정인데 정부가 부정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시일이 지나 면 국민들이 차차 알게 될 겁니다. 나와 같이 지방을 다녀 본 당신들이 더 잘 알 것이 아니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