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林錫珍 교수, 대통령에게 자수하다
 林錫珍 교수, 대통령에게 자수하다
 
 1967년 5월17일 수요일 오후 3시 정각, 朴正熙 대통령은 洪世杓를 따라 청 와대 1층 서재로 들어 온 林錫珍 교수를 만나 악수를 청했다.
 『林선생, 苦心이 많았겠습니다』
 
 현재 명지대학교 명예교수 林錫珍 박사의 회고.
 
 『朴대통령의 그 한 마디는 진심에서 나오는 위로의 말이었습니다. 멀찌감 치서 본 적은 있지만 가까이서 보니 단단한 분, 속으로 아주 당찬 분이란 느낌을 받았습니다』
 
 1949년 朴正熙는 좌익이었던 형 朴相熙의 영향으로 남로당에 연루되었다가 여순반란사건 직후 시작된 숙군 수사에 걸려 사형 구형까지 받았다. 그가 생명을 보전할 수 있었던 것은 白善燁(백선엽) 정보국장에게 구원을 요청 함과 동시에 과감한 전향을 시도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金昌龍(김창룡) 특 무대장은 朴正熙 소령이 실토한 명단에 의해 軍 내부의 좌익들을 대거 숙청 할 수 있었고, 이를 계기로 朴正熙는 형을 감면받아 자유의 몸으로 돌아왔 다. 그로부터 18년 후 대통령이 된 朴正熙는 자신과 비슷한 운명을 걷고 있 던 한 젊은 학자를 만나고 있는 것이다.
 
 이날 면담자리엔 朴대통령과 林錫珍, 洪世杓 세 사람만 참석했다. 자리에 앉은 뒤 朴대통령은 『林선생, 사실대로 다 얘기하시오. 아무 걱정 마시고 . 발단서부터 얘기해 주시오』라고 말했다.
 
 林錫珍은 자신의 출생에서부터 남북 분단의 현실과 어떤 식으로 인과관계가 엮여졌는지를 차분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2시간5분 동안 진행된 면담에서 朴대통령은 가끔 담배를 피울 뿐 표정의 변화도 없이 이야기를 듣기만 했 다고 한다. 가끔씩 궁금한 점이 있으면 질문을 할 뿐이었다는 것이다.
 
 林錫珍은 1932년 11월6일, 강원도 춘천에서 유복한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 다. 이화여전을 졸업한 어머니 金馨粉(김형분)의 절친한 친구인 金씨 姓 부 인과의 사이에서 林錫珍의 운명이 꼬이기 시작했다. 金씨 부인의 남편은 日本 교토(京都)대학에 유학하여 마르크스 경제학을 배우고 돌아 온 뒤 국내 에서 공산주의 운동을 하다 해방 전 獄死(옥사)했다. 미망인이 된 金씨는 林錫珍을 수양아들처럼 대했다.
 
 몇 년 후 金씨 부인은 강원도 고성군 郡守를 지낸 尹熙再(윤희재)에게 재가 했다. 林錫珍보다 네댓 살 위인 尹起鳳(윤기봉)이란 아들도 있었다. 창백한 얼굴에 동그란 안경을 썼던 전형적인 부르주아 집안의 외아들인 尹起鳳은 새어머니 金씨로부터 前 남편의 유품이던 「이조 사회 경제사」 등 마르크 스류의 서적과 사상을 전수받고 탐독하게 되었다.
 
 尹起鳳은 동생격인 林錫珍을 무척 아꼈고 자신이 독파한 이론들을 林錫珍에게 전해 주었다고 한다. 林錫珍은 尹起鳳을 형이라 부르며 따르다 보니 그의 영향을 받아 철학 및 사회학에 일찍 눈을 뜬 조숙한 중학생이 되었다. 고등학교 때는 古書店(고 서점)을 들락거리며 일본어판 서양철학사를 탐독하며 책상 앞에 「無知와 貧困의 타파」란 표어를 써 붙이고 삶의 목표로 삼게 되었다. 1949년, 경제학부를 졸업한 尹起鳳은 한국은행에 입사했다. 그는 이곳에서 남로당 비밀당원이 된다. 林錫珍의 회고.
 
 『수양 어머니의 사상적 배경이 크게 작용했습니다. 6·25가 일어나자 수양 어머니는 이승엽 서울시 인민위원장과 나란히 지프차에 올라타고 서울 거 리를 누비고 다녔지요. 알고 보니 수양 어머니는 북조선 노동당과 깊숙이 연결되어 있었고 서울시 여맹위원장 정도의 권세를 가지고 있었던 겁니다』 국군이 서울을 수복하자 이들 세 가족은 월북했다.
 
 『한국은행의 엘리트 직원들도 월북했고 서울대학교 문리대의 우수한 학생 들과 권위 있는 교수도 대거 자진 월북했습니다. 환상의 축적이 가져온 결 과였지요. 당시 한국의 지식사회 풍토는 좌파여야만 엘리트라는 모종의 의 식이 유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들과 편승하거나 동조하면 엘리트가 된다는 자부심도 있었지요』
 
 이 무렵 林錫珍은 집안에서 또 다른 비극을 겪어야 했다. 네 명의 사촌 중 6·25 개전 직후 소위로 임관되어 전사한 형님, 대한청년단을 지휘하다 인 민군에 참살된 형님이 있는가 하면 인민군이 되어 국군에게 사살된 형님, 그리고 한 분의 누님은 빨치산으로 활동하다 경찰에 잡혀 네 살바기 아이를 떼어 놓은 채 끌려가 총살을 당하기도 했다.
 
 의식과 경험이 동년배에 비해 앞서버린 林錫珍은 1952년 서울대학교 문리대 정치학과에 입학했지만 철학으로 목표를 돌렸다. 이무렵 朴鍾鴻 교수가 헤 겔의 변증법을 강의했고 林錫珍은 朴鍾鴻 교수로부터 격려를 받기도 했다고 한다. 1956년 1월, 그는 대학을 마치고 부모를 졸라 600달러를 만든 뒤 독일 하이 델베르그 대학 철학과로 유학을 떠났다.
 
 『자유당 정부의 무능과 부정부패에 환멸도 많았던 때입니다. 암울한 마음 으로 유학길에 오른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지요』
 
 그가 처음 독일 하이델베르그대학 기숙사에 도착, 여장을 풀자 얼마 안 있 어 그의 우편함에는 화려한 컬러판 화보로 꾸며진 북한 체제 선전물이 투입 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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