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독주재 北대사관에서 용돈받다』
1959년 6월 하순, 유학생 趙明勳(조명훈)이 林錫珍의 기숙사로 찾아왔다. 구수한 전라도 억양에 술을 좋아했던 趙明勳은 지난 1988년 5월 북한 방문 에 이어 한국에 들어와 북한 방문기를 펴낸 바 있으며 이때 북한 사회를 통 렬히 비판, 독일 교민사회에서 파문을 일으키기도 했다.
林錫珍을 만난 趙明勳은 이렇게 털어 놓았다.
『하루는 尹伊桑 선생이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날 오라고 전화를 했어. 자가 용이 생겼다는 거야. 그 어려운 형편에 차를 어떻게 샀을까 궁금했지. 같이 드라이브를 하자고 하더라고. 겸사 겸사 베를린에 갔더니 날 태우고 여기 저기 다니다가 차를 세웠는데 거기가 東베를린 도로데아슈트라세 4번지의 북한 대사관이야. 尹선생은 날더러 「趙君. 여기가 북한 대사관인데, 이 사 람들과 만나 얘기를 나눠보면 좋을 거야. 같이 들어가세」하고 날 끌고 들 어갔지. 조금 있다가 尹선생은 가버리고 나 혼자 남은 거야. 그런데 거기 대접 한 번 후했어. 밤새 술을 마실 수 있었으니까. 만나보니 다 같은 우리 민족이더라고. 尹선생이 생활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도 와주고 있는 것 같더라니까. 하긴 尹선생은 수입이 아무것도 없는데 車도 사준 것 같았어. 자네도 한 번 가봐』
당시 독일 교민사회에서 한국 유학생이 자가용을 몰고 다닌다는 것은 꿈 같 은 시절이었다. 趙明勳은 북한 대사관 주소를 적어 林錫珍에게 건네주었다 . 林錫珍의 회고.
『東伯林 사건의 원점은 尹伊桑에서 시작되고 있었던 겁니다. 그가 바로 첫 통로를 연 사람이었고 趙明勳도 이 사람 밑에 있었으며 나도 거기에 끌려 들어간 사람이었습니다. 尹伊桑은 1956년에 파리에 유학와 이듬해엔 베를린 으로 유학지를 옮겨 버렸습니다. 북한 대사관이 지척이었지요. 프랑스의 李應魯 화백은 부인 때문에 순진하게 북한에 말려 든 경우였습니다. 그때 독일에 유학 온 학생 대부분은 가난했습니다. 북한은 우리보다 경제사 정이 좋아 유학생이 찾아가면 술도 대접하고 돌아 올 때면 생활에 보태 쓰 라며 돈도 집어주는 겁니다.
당시 100달러면 우리 같은 유학생들에게는 아 주 큰 돈이었으니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데 거의 결정적이었습니다』 1954년경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던 林錫珍은 심야에 북한 방송을 듣곤 했다 . 어느 날 방송에서 남로당의 거물로 알려진 朴憲永(박헌영), 林和(임화), 金起林(김기림), 李承燁(이승엽) 등등의 이름이 나오면서 모두 미국의 스 파이 활동을 하다 死刑당했다는 내용이 흘러 나왔다. 이때부터 수양 어머니 金씨와 그의 아들 尹起鳳의 生死가 궁금했었다.
1959년 겨울, 친구 趙明勳으로부터 격려를 받고 林錫珍은 용기를 내 북한 대사관 앞으로 편지 한 통을 썼다. 수양 어머니 金씨와 아들 尹起鳳의 소식 을 알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해가 바뀌어 1960년. 한국에서는 4·19 소식이 들려 왔다. 독일에서 바라 본 고국은 승승장구하고 있던 북한에 비해 엉망진창인 나라로 비쳤다고 한 다. 지식인 대열에 포함된 유학생들은 남북한간 대결상황에서 「국가」 보 다 「민족」 개념을 택할 때 북한과의 접촉에 조국을 배반하는 자신을 합리 화할 수 있음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무렵 그에게 「조선민주청년동맹위원장 오정수」란 명의의 유려한 필체로 쓰여진 네 장의 편지가 도착했다. 편지는 긴 서론이 이어진 뒤 말미에 이 런 구절이 쓰여 있었다.
<지금 남에서는 피끓는 애국청년 학생들이 「오라 南으로, 가자 北으로」 하며 통일을 염원하는 열기가 고조되어 있지 않습니까. 이 절호의 기회에 나라의 장래를 함께 이야기하고 걱정한다는 것이 얼마나 뜻깊은 일입니까. 한번 만날 기회를 가집시다>
다시 며칠 뒤에는 東伯林의 북한 대사관 직원 石學哲(석학철)로부터 북한 대사관으로 정식 초청하는 편지가 왔다. 프랑크푸르트에서 東伯林까지 왕복 항공료와 체재비 일체를 책임질 테니 다녀가라는 것이었다. 林錫珍의 파란 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이후 林錫珍의 행적은 1967년 7월8일 중앙정보부가 발표한 수사 자료에 다 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동독 주재 북한 대사 朴日英에게 면접 서신을 보내고 1960년 4월 북괴 대사로부터 이에 응하는 회신을 접하고 東伯林 북괴 대사관 근처 「옥호 미 상 호텔」에 투숙하면서 북괴 石學哲로부터 조국의 평화통일, 북괴의 발전 상, 자연법칙에 의한 사회주의화 이념 등 교육을 받고 북괴 공작에 동조, 「黨命(당명)에 충실할 것을 선서한 후」 한국 모 신문사 서독 특파원을 「 대동하라는 지령」과 함께 공작금조로 미화 500달러를 수수, 1960년 8월 중 순경 前記 특파원을 대동, 東伯林으로 월경, 북괴 대사관 공작원 石學哲로 부터 전시와 같은 방법으로 교양을 받고 공작금조로 미화 400달러를 수수한 사실이 있고(하략·「 」 부분은 林錫珍씨가 사실과 다르다고 한 부분임-注)…> 李基陽 특파원에 대한 林錫珍 교수의 회고.
『참 안 된 일이었습니다. 내가 서울대학교에 들어가 가장 친하게 사귄 친 구였지요. 내가 1956년 1월 독일로 유학온 뒤 李基陽군은 수시로 나에게 편 지를 보내면서 「아무래도 나도 공부를 해야겠다」고 했습니다. 李基陽은 3년 뒤인 1959년에 특파원 신분으로 튀빙겐 대학에 유학 와 제가 공부하던 철학을 전공한 겁니다. 그만큼 저와 가까웠던 친구였습니다. 이 모든 사건 의 시작이 尹伊桑이었어요』
李基陽 기자가 실종됐던 1967년 당시 林錫珍은 이것이 자신에 대한 北측의 노골적인 경고라고 느꼈다고 한다.
『내가 한국으로 귀국하겠다고 北측에 의사를 밝히자, 그들은 나를 끝까지 신사적으로 말렸습니다. 내가 편지 한 통을 보내고 귀국해 버리자 李基陽 이 납치되었던 것은 나에 대한 북한의 경고로 보였지요』
다시 1961년으로 돌아가 보자. 북한 대사관에 발을 들여 놓았던 林錫珍은 그때부터 약 1년 동안 교포와 유학생 등 20여 명을 연결시켜 주었다. 그 자 신은 소개로 알았지만, 北측으로선 포섭이었다. 순진했던 林錫珍은 자신을 따라 유학 온 남동생 林錫勳과 쾰른에 살고 있던 여동생부터 北측과 연결 시켜 주었다.
林錫珍은 자신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도 잘 모른 채 공부를 계속하여 19 61년 7월26일 프랑크푸르트 대학에서 마지막 면접 시험을 마치고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잠시 1967년 5월17일 오후 청와대 집무실로 돌아가 朴正熙 대통령―林錫珍 과의 대화를 옮겨 본다.
林錫珍:『독일 유학을 해 보니 자유당 시절의 부패니 뭐니 해서 나라의 어 려운 사정이 가슴에 더욱 저려오고, 독일인들의 우월의식이 강해서 반발심 으로 우리들 대부분이 냉철한 國家 理性을 지향하기보다는 감상적인 민족주 의자로 변해 가더군요.
1961년 5·16이 일어난 뒤 어느 날 두툼한 봉투가 우편함에 들어 있는 겁니 다. 열어보니 속 봉투가 있었는데 발신지가 평양이었습니다. 내용은 제가 찾으려던 수양어머니 가족들이 북한에서 잘 살고 있다면서 尹起鳳씨는 조선 중앙은행에 근무하고 있다는 것과 사진이 들어 있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북 한으로 들어가게 됐지요』
朴正熙:『평양에는 어떻게 들어갔습니까』林錫珍:『모스크바를 경유해서 옴스크, 이르쿠츠크를 거쳐 들어갔습니다. 모스크바에서는 저를 안내하던 공작원들과 고리키 공원을 구경했지요』朴正熙는 고개를 끄덕이며 살짝 미소를 지었다. 林錫珍은 朴대통령이 「굉 장한 데를 구경하며 다녔군」 하는 뜻으로 웃었다고 기억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