林錫珍의 고뇌와 탈출
1961년 9월30일 서독으로 돌아온 뒤부터 林錫珍에게는 고뇌의 나날이 시작 되었다. 북한 대사관과 연결되었던 李基陽 기자는 이런 林錫珍과 만나 술을 마시면 노골적이다시피 북한을 비판하며 함께 고민했다.
『李基陽 기자는 술을 좋아하고 낭만적인 데가 많았습니다. 배짱도 좋아 웬 만한 것은 직설적으로 얘기하는 사람이었어요. 내가 북한에 들어가 보고 겪 은 걸 털어 놓자 술을 마시며 「그럴 줄 알았다. 나쁜 자식들. 우리를 이렇 게 속이다니」하며 노골적으로 불만을 터뜨렸어요. 조심성이 많았던 저는 겁이 날 정도였습니다. 그 이후 李基陽은 북한 대사관 쪽 사람들과 겉으로 는 아무 일 없이 지내려 했겠지만 다른 사람들 앞에서도 북한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다녔던 것으로 짐작됩니다. 미움을 사게 된 것이죠. 독일에서 나 와 가장 가까웠으니 내 문제로 인해 그가 피해를 보게 된 것인지도 모릅니다』林錫珍은 학위를 마친 뒤 독일에 머물며 연구원 생활과 번역 등을 통해 어 렵게 생계를 유지해 나갔다. 북한측은 간헐적으로 林錫珍의 생활비를 대주 곤 했다. 그런 만큼 林錫珍은 北쪽과의 관계를 정리할 수 없었다. 1963년 5월 결혼한 林錫珍은 급기야 가을에 그들이 요구하는 대로 노동당 입당원서 를 쓰게 되었다. 마음의 방황은 거듭됐다.
『학문도 할 수 없고, 인생이 아무 것도 아닌 게 되는 겁니다. 그렇다고 저 쪽 사람들이 요구하는 대로 북한에 들어가 헤겔을 공부한다는 건 상상도 못 할 일이었지요. 정리를 결심했습니다』
林錫珍은 정신적인 방황을 끝내야겠다고 결심하고 1964년에 東베를린의 이 원찬을 찾아갔다. 이원찬은 노동당 연락부 소속으로 1960년 초 東베를린에 부임해 유럽 공작 총책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그동안 조국통일에 기여한다는 생각에서 포섭공작도 하고 여러 일을 해 왔지만 이제 저로서는 서독에서의 삶에 아무 의미도 찾을 수 없습니다. 계 속 이런 식으로 생활할 경우 머잖아 정체도 노출될 겁니다. 신분을 위장해 서라도 서울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이원찬은 林錫珍의 제의에 대해 『너무 위험합니다. 우리가 보기에도 남한 당국이 林선생의 활동에 대해 낌새를 채고 있는지 아닌지 판단이 안 섭니 다. 좀 더 두고 봅시다』라며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林錫珍에게 방 두 칸짜리 아파트와 중국 음식점에 투자할 수 있는 돈을 건네주었다. 이로써 겨우 경제적 어려움은 해결되었지만, 정신적 고통은 전혀 해결되지 않았다 . 북측과 실랑이가 3년째 이어지던 1966년 5월, 북한 대사관에 나와 있던 공작원 이원찬은 사람을 보내 林錫珍의 귀국 의사를 타진했다.
『더 이상 못 참겠다고 말했지요. 그랬더니 회신이 왔는데 東베를린으로 와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거역할 수도 없었지요』
북한 대사관의 이원찬은 이렇게 말하더란 것이다.
『내게는 林선생의 귀국 문제에 대해 가부를 결정할 권한이 없소. 그러니 평양에 가서 林선생이 직접 당중앙을 설득해 재가를 받으시오』林錫珍은 이렇게 해서 두 번째로 평양을 들어갔다. 1966년 6월5일 평양에 도착한 林錫珍에게 對南 공작 총책인 중앙당 부위원 장 李孝淳(당 연락부장, 정치국 서열 4위), 연락국장 林春秋(최고인민위원 회 위원장) 등 거물급 간부들이 마중 나왔다. 林錫珍은 일주일간 초대소에 머물렀지만 한 순간도 밖으로 나올 수가 없었다. 이들은 번갈아 林錫珍의 방으로 찾아와 밤새 술을 마시며 「움직이지 말라」고 설득했다. 이효순과 가장 오랫동안 얘기를 나누었다.
『절대로 나를 의심하지 마십시오. 마음이 변해서가 아니라 나는 학문할 사 람인데, 내 적성에는 정치활동이건 뭐건 맞지 않으니 귀국해서 조용히 지내 겠습니다』
『林선생, 너무 위험합니다. 만약 문제가 생기면 해결책이 없지 않소』 조용히 설득하던 그들은 닷새가 지나면서부터 자기들끼리 새로운 방법을 찾 느라 고심하는 모습이 보이더란 것이다.
『우리가 계속 생활비를 대줄 테니 일단 스위스나 네덜란드 아니면 벨기에 로 이사를 하시오. 일단 뚝 떨어져 있으면 우리가 상황을 판단해서 적당한 때 귀국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하겠소』
林錫珍은 잘못하다가는 북한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다고 생각하고 그들의 주 장을 받아들이는 태도를 보이면서 서독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효순은 생 활비에 보태 쓰라고 2000달러를 건네 주었다.
이 무렵 林錫珍은 북한에서 등골이 오싹할 만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들은 林錫珍에게 尹伊桑과 함께 崔德新(최덕신) 서독 대사까지 거론하며 자신들 과 밀접한 관계가 있으니 무슨 일이 있으면 도움을 요청할 수도 있을 것이 라고 말했다.
『한 국가의 외무장관을 지낸 사람까지 연결되었다니 큰일이다 싶었습니다 . 빨리 돌아가지 않으면 내가 더 큰 죄를 짓게 될 것 같았지요』 부인과 함께 서독으로 돌아온 다음날 이삿짐을 서울로 발송하고 빈 손으로 암스테르담으로 가서 서울행 비행기를 탔다. 떠나기 전 林錫珍은 이효순 앞으로 한 통의 편지를 보냈다.
「내가 당신들로부터 이탈행위를 하지만 통일에는 장애가 되거나 역효과가 되는 일은 절대 하지 않을 것입니다」






















